마태복음 26:57~68 성전을 허는 자 2017. 10. 15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본문 57절을 보면 예수를 잡은 자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고 왔는데 밤중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먼저 직전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가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고 온 것입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입니다. 이 당시의 제사장은 이미 세상의 권력과 결탁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모아두었습니다.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란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71명의 회원으로 구성되는데 삼분의 일만 정족수를 채우면 그들의 결의를 집행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58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갑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라도 따라 간 것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지려고 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결말을 보려고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가 그 하속들과 함께 섞여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무슨 결말을 보려고 하였을까요? 지금까지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이 저렇게 맥없이 잡혀서 죽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대 반전을 기대하고 따라갔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재판 받는 과정과 그 수모당하는 모습을 보고 결국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59~51절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습니다. 이미 죽이기로 결의하였지만 형식적이라도 예수를 죽일 증거를 찾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성인남자 두 사람의 증언이 있으면 사형까지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잘 일치가 되지 않는데 딱 한 가지 두 사람의 일치가 되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9~22절입니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 쫓으신 장면이 나오지만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분명하게 나오며 이 말씀은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짓겠다고 하신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러한 말에 대하여 두 명의 증인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을 헐어버린다는 말씀이 얼마나 신성을 모독하는 것인지 유대인들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1~2절을 보면 유대인들의 성전에 대한 자부심을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성전의 건물을 자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을지 알게 해 달라고 합니다. 성전의 무너짐은 곧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파괴하는 자는 당연히 신성모독이며 죽어 마땅한 자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다른 증인들은 두 사람의 일치함이 없었는데 성전을 헌다는 이 증거는 분명한 두 증인이 나타남으로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본문 62~63절을 봅니다.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님께 심문을 합니다.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고 묻자 예수님은 아무른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대화를 하거나 심문을 하거나 간에 아무른 대답을 안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멸시를 포함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하지 않으심은 이사야 53:7말씀의 성취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 말씀으로 예수님께 침묵을 하십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태복음에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맹세하게 함으로 심문을 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성전을 헐고 새로운 성전을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기에 물은 것입니다. 메시아 대망사상을 성경에 근거하여 잘 아는 사람은 메시아가 성전을 새롭게 할 것을 압니다.

 

스가랴 6:11~13절입니다. “11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지만 지지부진하게 되었을 때에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가 여호와의 명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도록 독려합니다. 이 당시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은과 금으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면서 하는 말이 싹이라고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면류관은 새 번역에서 왕관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이 왕관을 쓴다는 것은 장차 왕 같은 제사장이 성전을 재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메시아 칭호인 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초라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무려 46년 동안 증축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던 헤롯은 성전을 엄청나게 보수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호감을 사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적인 인물임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헤롯만이 아니라 왕이나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자들은 다들 자신이 메시아적인 기능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정치꾼들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정통하다는 제사장이나 서기관들 이라면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오면 성전도 새롭게 할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심문하기를 내게 정말로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성전을 헐고 세우겠다고 하느냐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시키며 질문을 합니다. 이런 질문은 예수가 절대로 메시아 일수는 없다고 여기면서 한 질문입니다. 자기 제자들에게서 배척받았고 대제사장들의 하속에게 잡혀 온 초라한 몰골의 예수가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죽이려고 결의한 자들의 눈에는 예수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6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시다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시키면서 심문을 하자 드디어 대답을 하시는데 네가 말하였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스가랴서의 성전을 새롭게 세울 싹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두 곳의 메시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시편 110: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42절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으로 오겠느냐는 질문을 하실 때에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렇다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 되겠느냐고 하시자 다시는 예수님께 대하여 감히 묻는 자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하시면서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한곳은 다니엘서 7:13~14절입니다.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시편과 다니엘서의 두 곳의 말씀을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지금 초라한 몰골로 끌려와 있는 예수가 그 메시아라고 하니 누구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전을 헌다는 것도 신성모독인데 이런 말을 감히 하니 네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대제사장이 물은 것은 조롱하면서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침묵하시다가 그런 대제사장의 질문에 쇄기를 박듯이 자신이 조금 후에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을 것이며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는 시편과 다니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대제사장이며 산헤드린 공회원이며 예수님을 심문하는 자리에 둘러선 자들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유대인들만큼 성경을 잘 알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신성모독자로 몰아서 죽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에 회개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겠습니까? 우리도 동일하게 전자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의 문자대로 생각한 메시아 상이나,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아 상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로 선 예수가 자신이 메시아라고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신성모독이라고 하면서 사형시켜야 한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판단입니다.

 

본문 65~66절입니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신성을 모독한 자는 사형시킵니다. 이제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은 확정이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무너뜨리는 자이며 자신이 메시아라고 하는 신성모독자라고 몰아서 처형시키려고 확정을 한 것입니다.

 

67~68절입니다. 신성모독자로 몰린 예수를 이제 가장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조롱합니다.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멸시를 받는 것인지 침 뱉음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평생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의하여 침 뱉음을 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하라고 하면서 너를 친자가 누구냐고 조롱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온 베드로가 보고서 어떻게 부인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다시 베드로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후에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특히 스데반 집사의 성전에 대한 설교를 하자 성전을 허무는 자라고 예수님을 죽인 그들이 다시 스데반을 죽입니다.

 

사도행전 7:46~53절을 봅니다.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2014년도 예레미야 설교의 결론 부분을 인용합니다.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왜 이 설교를 듣고서 돌로 쳐 죽인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성전을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셨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여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면 그런 인간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과 제사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일으킨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기에 더 이상 구약의 제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건물로 된 성전을 붙들고 있는 자들에게는 복음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의 종교성의 최고 정점이 거룩한 신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거저 장독대 위에 찬물 한 그릇 떠 놓고 비는 것은 자신의 정성만 바치는 것이지만 거대한 신전을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희생을 해야 합니까?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절약하고 빚을 내어가면서 최선을 다하여 거대한 신전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신으로부터 자신이 바친 희생과 정성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정성의 집약체인 신전을 파괴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결코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에 가장 많은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쏟아 붓고 있습니까? 그것이 자녀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자신의 사업체입니까? 자기들이 세웠다는 교회당입니까? 그것을 무너뜨리는 자를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죽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를 허물기 위하여 오시는 주님을 누가 영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설교를 하면서 이 결론을 내린 것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자 백성들이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건 설교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입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자기의 것이라고 하나도 없는 사람이 주의 피 값으로 구속하신 성도입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하며 고집하며 사는 것이 다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날마다 뽑히고 파괴당하고 파멸 당하며 넘어뜨리는 것을 전하는 것이 복음적 설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그곳에서 건설하며 심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에 허무는 자로 오십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무너질 때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내가 허물어질 때에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게 하겠다는 주님의 일하심을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