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23~33 부활 때에는(3) 2017. 2. 12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부활에 때에 대하여 오늘로 세 번째 말씀을 봅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부활의 증거를 모세오경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세오경만 믿는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몰라서 성경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부활에 대하여 질문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출애굽기를 통하여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부활의 근거로 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으로 이들이 죽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산 자들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하여 부활의 어떤 것이며 부활의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의 말씀에서 성도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왜 성도가 가장 불쌍한 자가 되는 것입니까? 믿음이란 보이는 것을 믿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된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며, 이방인들에게는 로마에 의하여 처형당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이 성도에게 주어지고(3:14,15), 참된 지혜를 얻게 되었으며(8:28),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려가게 된 것입니다(12:32).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완성과 부활까지 보게 됩니다.

 

조류독감으로 수백만 마리의 닭과 오리들이 땅에 묻혔습니다. 이제 구제역으로 그 큰 소와 돼지들이 땅에 묻히고 있습니다. 이런 짐승들을 잡아먹는 인간들도 사실은 죽음에 삼켜지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생에게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다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담의 역사를 끊으시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그의 사망으로 사망을 잡으신 것입니다. 사망을 그의 사망으로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그 부활의 영이 임한 자들은 이 역사 속에서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는 삶이 아니라 의와 생명에 종노릇하는 삶입니다. 의와 생명의 종노릇하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입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도 이 세상에서 탄식하며 산다는 말씀을 로마서 8:23절에서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몸의 구속 곧 부활의 때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그 내용을 좀 더 풀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이란 우리의 몸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몸은 무너집니다. 이 몸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헛된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무너질 것을 희망으로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런 희망을 품고 사는 자들도 결국은 이 세상에서 죽습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무너져 내릴 것을 모르고 살아갈까요? 모든 사람이 죽는 길로 가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무너져 내릴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신이 세상의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영이 임한 자에게만 자신의 무너짐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무너질 이 장막과 같은 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집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처소, 새로운 몸이란 사람이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늘의 몸을 입을 때 까지 성도는 이 땅에서 탄식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탄식하는 이유는 세상의 어떤 것들이 없어서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속한 모든 것들은 다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무너져 내릴 것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그날에 가속도만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탄식은 세상의 무너질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탄식입니다.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진 것같이 탄식하고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우리의 몸 자체가 너무 너무 무거운 짐이 됩니다. 저희 어머니가 어디로 움직이시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보는 사람이 안타깝습니다. 허리가 좋이 않으시니 얼마나 조심조심 움직이는지 몸 자체가 무거운 짐이 됩니다. 우리도 다 그렇게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이 부활의 영광의 몸을 덧입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삼켜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삼키려고 합니다. 예수를 나의 소유로 삼켜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삼켜지는 것이 성도의 삶의 과정입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끌려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려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보증이란 담보물입니다. 우리의 몸의 구속이 일어나는 보증의 담보물이 성령입니다. 이런 보증이 있는 자의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6~10절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몸으로 있을 때는 주와 따로 있다는 말은 우리의 무너질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너질 몸이 아닌 신령한 몸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이후의 몸의 모습니다. 부활 하신 이후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그런 정도의 몸도 놀라운 몸이지만 그럼 몸은 아직 영광을 받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을 받은 상태의 몸은 무너져 내릴 몸으로 뵙게 되면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이 바울이며 사도요한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영광의 몸을 덧입을 것을 소망하는 자들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선악 간에 행한 것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악 간에 행한 것을 받는다고 하니 이 세상에서 얼마나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였느냐는 따라 상급이 다르다는 차등 상급을 이야기 합니다. 참으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부활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런 차등 상급을 말하는 자들에게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선악 간에 행한 것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은 요한복음 5: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며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무너져 내릴 혈육으로 행한 것이 무엇이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선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만이 선한 것이며 그 일을 은혜로 믿는 자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한 일이란 자기의 기쁨과 자기의 자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다닌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사는 자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기쁨을 위하여 살든지 죽든지 하십니까?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살든지 죽든지 하고 있습니까? 정말로 부활하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보증으로 임하여 있습니까?

 

사도행전 4:32~37절입니다.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들이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고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기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부활의 영이 임한 자들이 무엇을 알았기에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무너져 내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형제와 나눌 수 없다면 과연 우리 안에 부활의 영이 임하였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7:18절입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바울사도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쟁론을 합니다. 그런데 그 철학자들은 바울을 이방 신들을 전하는 자로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와 부활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우상이 가득한 곳에서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17:22~25절입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바울자신도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용납할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신 줄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는 하나님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면 마태복음 20:28절의 말씀을 바울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영이 임한 자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자 조롱하는 자도 있고 다시 듣고자 하는 자고 있고 그 중에 몇 사람은 가까이 하여 믿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에 속합니까?

 

로마서 6:3~5절입니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세례로 말합니다. 세례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됩니다. 이렇게 죽은 자라야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타락 이후에 인간이 추구하는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타락 이후의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자신이 주인 된 삶입니다. 모든 세상을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적용을 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면 기뻐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와 자아라는 것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이 역사 속에서 죽는 자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 이 길로 가게 됩니다.

 

빌립보서 3:1~6절입니다.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사도가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면서 그들을 개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손으로 행하는 할례파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삼가라고 하면서 참된 할례 파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몸의 할례가 아니라 부활의 영이 임함으로 마음의 할례가 일어난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런 모습이 부활의 영이 임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은 율법의 의로 이루어낸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기 됩니다.

 

7~9절입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이것이 성령이 임한 자들의 신앙의 방향성입니다. 내가 가진 의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부터난 의가 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어떻게 살게 됩니까?

 

10~16절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부활의 영이 임한 사도가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 달려가는 삶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 신앙의 푯대가 무엇입니까?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미 부활의 영이 임한 자인데 부활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애써서 노력하여 부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이 임하여야 부활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 곧 성령이 임하지 않고 스스로 부활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고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자들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길을 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좋은데 이 길은 싫다고 한다면 부활의 영이 임한 자가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의 영이 임함으로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자가 됩니다. 그 사로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영이 임한 자만이 십자가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자신들의 탐심을 따라 땅의 일을 생각하고 땅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 전하는 자들을 잘 살펴보고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영광이라는 것이 땅의 것들이라면 그들의 신이 그들의 배라고 합니다. 즉 그들의 욕망이 그들의 신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영이 임한 성도는 그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늘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본 그 영광의 주님, 바울이 본 그 영광의 주님, 그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우리의 이 낮은 몸, 이 죽을 몸, 이 썩을 몸을 바꾸어 주실 그 날이 부활의 날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3~18절입니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부활이 일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렸으니 부활에 소망이 흔들린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다면 예수 안에서 자는 자 곧 죽은 자도 하나님께서 데리고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자들도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세대주의적인 휴거가 아니라 재림 시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근거는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의 호령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이미 하늘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 곧 울려 퍼질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