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42~47 죽음의 능력 2020. 4. 19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오늘 설교제목이 죽음의 능력입니다. 죽음이 무슨 능력이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 있는지 코로나19를 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가 두려운 것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도 있지만 그 바이러스로 인하여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두려운 겁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학교도 못가고 학원가는 일도 못합니다. 경제활동도 위축을 받습니다. 교회 모임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이러스를 극복한다고 하여도 죽음은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죽음을 평소에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신에 속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죽음은 왜 왔습니까? 사망이 되는 죄의 시작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가운데 태어나서, 죄와 사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사망인 둘째 사망아래 들어가는 것이 죄인의 종착역입니다. 그런데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도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의로운 죽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타인을 구하기 위하여 희생하는 죽음은 그 죽음이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음으로 타인을 구하여도 목숨의 연장일 뿐이지 죄 용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죄가 용서 받는 일은 죄 없는 분의 희생으로만 가능합니다.

 

창세기 3:15절입니다.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교회 다니거나 안 다니거나 간에 선악과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은 전능한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느냐고 합니다. 이런 생각자체가 이미 선악과 따먹은 후손이라서 선악판단을 자기중심으로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계획이 다 있습니다.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되는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도 원수가 되게 합니다. 여기서 뱀의 이름이 다양하게 성경에서 나옵니다. 이 뱀을 옛 뱀, , 사탄, 마귀라고 합니다(12:9,20:2). 이들이 사람들을 조종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그 순간에 이러한 사탄의 머리가 깨어지고 영원한 결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보이지만 그 예수님의 죽음이 사탄을 이기는 능력의 죽음입니다.

 

히브리서 2:14~18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우리 인간은 혈과 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혈과 육으로 오신 것은 죽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참으로 능력 있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능력은 한평생 죽음의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십니다. 죽음에 종노릇하는 모습은 죽음에 대하여 벌벌 떠는 모습도 있지만, 죽음을 일부러 잊어버리고 살려고 현실의 성공이나 쾌락에만 집중하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속량을 받은 사람은 죽음의 종노릇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반응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42~43절을 봅니다.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지난주에 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시면서 죽으셨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 전날 곧 금요일 오후입니다. 이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존경 받은 공회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에 시체를 나무에 달아두지 않는 것이 율법입니다.

 

신명기 21:22~23절입니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라고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율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회의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기에 밤새 시체를 나무에 달아둘 수도 없거니와 다음날이 안식일 준비일이기에 더욱 시체를 나무에 둘 수가 없어서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장사를 지냅니다.

 

44~47절입니다. “봉독 빌라도는 예수님이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깁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서 달려서 며칠을 가는 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을 불러 확인 한 후에 요셉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줍니다. 요셉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세마포로 사서 내립니다. 그리고 그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놓고 돌을 굴려 무덤에 놓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무슨 일을 이루신 것입니까?

 

다시 본문 43절을 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마태복음 27:57절에서는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악한 자와 함께 죽으셨으나 죽으신 후에는 부자의 무덤에 묻히신다는 이사야 53:9절의 성취도 됩니다. 누가복음 23:51절에서는 괄호부분에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자는 결의를 할 때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도 다수결로 결의하기에 그 말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9:38절을 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셉이 예수의 제자이지만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공개적으로 드러내면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8:22). 관리 중에도 믿는 자가 많았지만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을 못한 이유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12:42,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이야기를 다 찾아본 이유는 요셉도 겉으로 숨겼던 사람입니다.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이단으로 매장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관리들 중에도 마음으로는 믿는데 겉으로 드러나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못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도 있었습니다. 산헤드린공회원이고 존경도 받고 부자인데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일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모른 척 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죽고 나자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까?

 

요한복음 19:38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평소에 제자임을 숨겼는데 이 일후에이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입니다. 그런데 죽고 나자 갑자기 빌라도를 찾아갑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도 총독을 단독으로 면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빌라도를 만나서 무슨 모의를 했는지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돌히 빌라도를 찾아갔다는 말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대담하게’ ‘용기를 내어로 번역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하고 담대한 용기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요셉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출교가 두려워 숨겼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대담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이 죽으심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조롱받으시고 죽어가는 순간에 한 강도를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처형하던 로마의 백부장이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도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서 빌라도에게 시체를 달라고 한 아리마대 요셉의 용기도 예수님의 죽으심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찾아본 창세기 3:15절의 말씀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뱀의 머리가 깨어졌습니다 사탄의 권세가 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적들을 이기셨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십자가로 다 이루셨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십자가로 무엇을 이루었는지 봅니다.

 

베드로전서 3:18~20절입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2)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일이 무엇입니까? ‘단번에라는 말은 단 한번에라는 말입니다. 그 단 한 번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일이 죄를 위하여 죽으신 일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겁니다. 그렇게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부활을 말씀하시는 내용이 아닙니다. 부활은 삼일 만에 몸으로 부활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 그 삼일 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이 계시를 받아서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옥의 영이라고 하니 가톨릭에서는 연옥설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미 옥의 영들이 누구인지 설명합니다. 방주에 타지 않고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만 옥에 갇힌 영들이 아니라 창세로부터 예수님의 초림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모든 자로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모든 예언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구약의 구원과 심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초림부터 재림까지는 그 십자가의 완성이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에 그 영으로 하신 일이 사탄을 이기신 것이며 또한 구약의 불신자들에게 심판이 임하였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어지는 21~22절입니다.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3)표니 곧 4)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구약의 노아 사건을 십자가로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그 십자가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그 물이 세례라고 합니다. 노아 홍수 때에 방주를 타지 않은 자들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방주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자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약의 신자들을 그 피로 씻어서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바로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집니다(2:6). 이것을 묵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합니다. 이런 내용을 십자가에서 미리 보여주시는 내용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나타났습니다. 요셉이 공회원 자리와 백성의 존경과 부자 됨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7:13~17절입니다.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바로 앞에 나오는 144천도 십자가로 구원 받은 구약의 신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12지파의 이름들이 나오고 그들의 완전한 수를 말하기 위하여 천을 곱하여 144천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모든 믿는 자들도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이 오심을 바라보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8:56). 그러므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은 재림 직전에 나오는 자들이 아니라 모든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고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11). 그 환난 중에서 예수님의 피로 씻김을 받아 흰옷을 입고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12:9절입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큰 용, 옛 뱀, 마귀, 사탄이 그의 사자들과 함께 언제 땅으로 내어 쫓깁니까? 십자가 때임을 창세기 3:15절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0:1~3절입니다.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이 사건도 십자가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탄을 결박하여 천년동안 무저갱에 던져 넣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탄이 머리가 상하여 결박되어 있기에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초림부터 재림까지가 천년입니다.

 

요한계시록 20:7절입니다.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여기서 사탄이 놓이는 것은 영원한 심판을 받아 무저갱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놓임이지 성도를 핍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유치장에 있다가 교도소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부분은 마가복음 끝나고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일이 요한계시록 4:1~20:6절까지이며 20:7절 이후가 재림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공회원이며 부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매장을 함으로 예수님의 제자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공회원의 지위도 잃고 백성의 존경도 날아가고 재산도 날아갑니다. 그러함에도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시체를 달라고 한 이유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임한 자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영원한 생명으로 인하여 넉넉히 감당해 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능력, 그 십자가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