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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10~14 길 잃은 양 2016. 10. 2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3)(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태복음 18:1~14절까지 나오는 단어들 중에 세 단어를 말씀드리면 어린 아이,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길 잃은 양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나 오늘 우리나 간에 다들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적도 높아야 하고, 직급도 높아져야 하고, 교회당에 나와도 장로나 권사도 한 번 해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된 본성은 어린 아이 같고 작은 자가 되고 길 잃은 양처럼 되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한 제자들과 여전히 높아지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며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 큰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이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 아이, 작은 자, 잃은 양으로 표현되는 이런 자들은 자본주의 용어로 말하면 돈이 안 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런 자를 영접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나를 확장시키기 위한 일입니다. 이웃을 위한 이타적은 행동을 하거나 신에게 정성을 바치는 것도 결국 자아의 확대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자신의 몸집을 줄이기 위한 행동도 합니다. 다이어트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몸무게를 줄여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합니다. 회사는 구조조정을 통하여 더 튼튼하여 지기를 원합니다. 교회도 더 이상 등록을 받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처음 교회 오는 자가 아닌 다른 교회에서 오는 자들의 등록을 더 이상 안 받는다고 하니 그것으로 칭찬을 또 받습니다. 물론 그런 교회는 이미 수천 명의 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어린아이, 작은 자,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않기를 힘쓰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봅니다. 삼가라고 합니다. 삼간다는 것은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 작은 자는 앞에서 본 대로 어린아이이며 예수님을 믿는 자 중에 작은 자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와 작은 자가 예수님임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어른 된 세상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큰 자가 되기를 원하지 스스로 돌이켜 어린아이, 작은 자, 약한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이렇게 모인 것은 작은 자가 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큰 자가 되고 싶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 작은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시며 동등하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업신여김을 받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높아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자는 어느 정도로 자신이 낮아져야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아 죽은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가난하여져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그 이름에 무릎을 꿇는 자가 구원을 얻는 자들입니다.

 

다시 본문 10절을 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왜 업신여김을 받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업신여김을 먼저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업신여긴다는 표현들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배부르게 되자 구원의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업신여김으로 다른 신을 섬기게 됩니다(32:15).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30:12) 하나님의 언약을 업신여긴 것입니다(17:18,19). 업신여긴다는 말은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하찮게 여기고 깔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 말씀과 그 언약을 업신여긴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23:8~12절입니다.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헤롯이 예수를 보고 기뻐한 것은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그런 기적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여러 말로 물으나 예수님은 아무 말로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헤롯이 예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군인들도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헤롯과 빌라도와 그 군인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으시고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시에 환호한 자들도 며칠 만에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정도로 업신여김을 받았습니까?

 

마가복음 14:65절입니다.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업신여김정도가 아니라 모독과 조롱을 당합니다. 이러한 치욕을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들에게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업신여김을 받은 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린아이, 작은 자, 업신여김을 받는 자들의 표상이란 구약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내용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인 약자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아무 의지할 것이 없어서 주님의 도우심만 바라보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이 늘 주님을 의지하기에 이들의 천사들이 항상 주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3~14절을 봅니다. “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시편 110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이 천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예수님의 심부름꾼으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낸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봅니다. “3)(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약의 몇 곳에 이렇게 없음이 나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어떤 사본에는 있는데 어떤 사본에서는 없는 경우에 이렇게 표시하여 두었습니다. 그래서 각주를 보시면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잃은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문제가 있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환경을 개선하면 나아질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으로 이방인들은 윤리와 도덕으로 나아진 사람, 나아진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이래 인간이 나아진 면을 보지 못합니다. 갈수록 문제는 더 복잡해질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런 죄의 근원에 직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죄를 인정하지 않고 위장하려고 합니다. 자신들은 완전히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시 길을 잃고 헤매는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길만 알려주면 얼마든지 자신들의 힘으로 바른길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금요일 십자가 신비와 역설을 본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에 들어가기 전에 인간들끼리 보는 견해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면과 부정적 견해 둘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우리 인간에게도 사랑, 희생, 나눔도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을 탄복하게 하는 몇몇 위대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불이 난 원룸의 초인종들을 다 눌러서 나오게 하고 본인은 사망을 한 자를 의사자로 지정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을 타고난 죄인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하나님과 인관의 관계를 호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제하고 우리 인간끼리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죄를 발견하기 위하여 그렇게 높은 척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인해 이미 충분히 깊은 좌절과 고통과 비탄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죄를 짓는 자 만이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죄를 만들어 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만으로도 상실과 외면과 소외와 단절 속에 살아갑니다. 우린 우리에게로 버려져 있기에 전쟁과 탄압과 이기심으로 서로를 학대하고 죽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참혹한 실상을 조장하거나 외면합니다. 인간은 죄에 버려진 자들이기에 인간의 부산물에도 노예가 되고 중독이 됩니다. 죄의 지배 속에서 죄를 위장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종교적으로 죄인입니다. 안셀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죄 덩어리입니다.

 

잃은 자의 의미를 말씀드리기 위하여 이렇게 인용을 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갇혀 있기에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그 결과를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이 왜 행한 것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보다 430년 후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은 율법을 받을 자격도 지킬 능력도 없기에 자신들에게 주었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시각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 잃어버린 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과 이방인과 같은 자들이 잃어버린 자들이며 자신들은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본문 12~1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질문 형식으로 묻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이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이 됩니까? 한 마리 찾다가 아흔아홉 마리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을 위하여 아흔아홉 마리는 안전하게 양 우리 같은 곳에 가두어 놓고서 찾아 나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이 본문에 전혀 없습니다. 그냥 산에 두고 찾아 나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가 하면 우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원리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다수결의 원칙으로 살아갑니다. 소수 의견은 반영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면 그것이 법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경제적인 논리나 민주주의 원리로는 결코 알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잃어버린 양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양을 찾는 선한 목자가 누구신지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바로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의 표상이 세상에서 어린아이, 작은 자, 길 잃어버린 양의 모습으로 등장을 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길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볼 때에는 세리와 죄인과 창기와 이방인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찾아내신다는 말씀이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시면 잃은 자를 찾으시는 비유가 세 가지 나옵니다. 첫 번째에 오늘 말씀처럼 약 백 마리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하나를 찾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는 두 아들 중에 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는 내용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은 다 한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자를 찾으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잃은 자가 누구인지는 두 아들의 비유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 비유 모두 잃은 자를 찾아내신 분의 기쁨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5:7,1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잃어버린 양 한 마리,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를 찾은 주인의 기쁨을 말합니다. 잃어버린 양이 스스로 돌아 올 수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스스로 주인 앞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자들을 주인이 직접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1~21절입니다.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라서 본문만 읽어도 그 내용은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서 또 인간의 주체성이 발동을 합니다. 양이나 동전은 주인이 찾아 나서지만 이 아들을 타락하였지만 스스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사는 땅에 흉년이 들지 않았다면 돌아올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자신의 가진 것을 허랑방탕하게 다 써 버리고 돼지 치는 곳에서 먹을 것도 없게 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본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이 간 곳에 흉년이 들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돌아오게 하셨기에 그 아들이 스스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0516~19절입니다. “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서 야곱과 그 후손들이 애굽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애굽에 들어가서 살다가 사대 만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요셉을 먼저 보내서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아버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내십니다. 사람은 망치고 하나님은 이루시는 것이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이 사는 곳에 흉년이 들고 먹을 것이 없으니 아버지 집을 생각하고 돌아오는데 돌아오면서 아는 것 한 가지는 자신은 자격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맞이합니까?

 

누가복음 15:22~23절입니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백 마리 가운데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 열 드라크마 중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결론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시는 내용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죽은 내 아들이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8: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과 내용이 아니라 형태가 비슷한 모습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 모든 부요함을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자신들은 의롭다고 여기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허랑방탕한 자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가난해 지심을 통하여 우리가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싫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25~32절입니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과 함께 어울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이 큰 아들에게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살아생전에 받아가는 것도 불효막심한 죄인데 그 유산으로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자라고 맏아들이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는데 염소새끼의 보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잃어버린 자가 돌아왔는데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한다고 삐져서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자들이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시는 것은 오직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나 작은 자나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임을 말씀으로 알게 됩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 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찾아내어진 것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직 그 아들의 희생, 곧 그 십자가로만 자기 백성을 찾아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받은 긍휼을 알기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입니다(14:1~4).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또다시 자기 의에 붙들려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며 잃어버렸다가 찾아내어진 자들입니다(벧전2:24~25). 우리의 처음 자리가 어떠하였는지를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