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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29~34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2016. 12. 4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지난 금요일 성경공부를 마치고 부산에서 오신 몇 분과 교제를 하는데 어떤 분이 우리 갑순이라는 드라마를 딸과 함께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갑순이 어머니가 좀 속물로 나옵니다. 남편이 퇴직금을 날려먹자 남편을 구박하면서 딸이 공무원 준비하는 갑돌이와 사귀는 것보다 돈 많은 집의 아들과 사귀기를 원하는 그런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딸과 함께 보는데 그 딸이 갑순이 엄마가 자기를 닮았다고 하더랍니다. 자기는 그렇게 까지 생각안하고 자녀를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자녀는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한마디 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노골적인 압력도 가합니다. 너 그렇게 공부해서 이다음에 무엇을 하고 살래? 이런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를 들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말로는 다 너를 위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압니다. 자기들의 부모가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는 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불쌍한 자들이 맞습니다. 이들은 맹인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인지 중도실명자인지 모르지만 이들이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본문 29절입니다.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때는 유월절입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삼대 절기에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나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절하면서 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두 아들이 주의 좌우편에 앉는 것을 구하였습니다(20,21).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은 이들을 보면서 분노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나라의 연장으로 보고 서로 시기와 질투를 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이라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등극할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입니다.

 

30절입니다.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소경을 눈뜨게 하셨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느 정도로 큰 소리로 질렀겠습니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가는 중입니다. 작은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는데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한 메시아 호칭입니다. 메시아가 주가 되심과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것을 이들이 알고 부르는 것입니다. 눈뜬 사람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맹인들이 주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은 은혜 외에 해석이 안 되는 것입니다.

 

31절입니다.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질러 부르니 무리들이 어떻게 합니까?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합니다. 이 무리들 중에 제자들도 포함이 됩니다. 이미 앞에서 본 대로 어머니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꾸짖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 사역을 하시는데 어린 아이와 맹인들은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눈뜬 자신들이 예수님을 도와 메시아 왕국을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어린 아이들을 쫒아내려고 하였고 맹인들을 잠잠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가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습니다.

 

32~33절입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을 원한다고 하였지만 이 맹인들은 당연히 눈뜨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께서 만져주신 것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는 모습과 연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새로운 창조를 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원한 것과 맹인이 원한 것을 절묘하게 배치시킴으로 누가 맹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39~41절입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하여주셨습니다. 이 맹인은 자기 눈을 뜨게 하여주신 분이 누구신지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친히 그 사람에게 자신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인가 하자 예수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래도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보면 이미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가 크냐는 다툼을 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이들에게서 무엇이 없습니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내용이 없습니다. 앞에서 예를 들어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세상에서도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런데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 무언가 있어 보이게 자신을 꾸밉니다. 이런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도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상호위선과 상호기만 속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라는 곳에 모여서 무엇을 추구하겠습니까? 나는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아무른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로 나오십니까? 아니면 나 같은 괜찮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십니까?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대부분 예수님을 믿고 나서 더 괜찮은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먹히는 이유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들 속에서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없어집니다. 그런 내용들은 처음 예수 믿을 때 하는 말이고 예수 믿고 나서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멋있게 선물보따리를 들고 가고 싶어 합니다. 이렇데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면 갈수록 필요가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맹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두 번이나 주님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주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두 맹인이 이런 고백을 한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눈뜬 자들도 이렇게 부르지 않는데 맹인이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이들이 맹인이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직접 성경을 볼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면서 그들이 부르는 찬양을 들을 수는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찬송이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입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의 표제어에 전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노래 중에 두 편을 봅니다.

 

시편 123편입니다.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서 이런 찬양을 하면서 올라갑니다. 여리고는 낮은 지역입니다. 예루살렘은 시온산에 위치하기에 성전에 올라간다는 표현을 합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성전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이런 찬양은 하지만 그러나 자신들이 정말로 불쌍히 여김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의 심한 멸시와 안일한 자의 조소가 그들의 영혼에 넘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은 맹인들이 이 찬송을 부르기에 합당한 자들입니다. 눈뜬 멀쩡한 사람들이 이 맹인을 향하여 잠잠하라고 한 것이 멸시와 조소입니다. 이들이 심정이 어떤 심정인지 시편 123편 자체가 밝히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주를 맹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주라고 부르짖습니다. 어떤 자세로 주를 향합니까?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종들이 있었습니다. 솔거노비가 있었고 외거노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인의 소유입니다. 이들은 주인이 먹고 살 것은 줍니다. 저는 이 시편을 보면서 가난한 소작농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소작농들은 노비는 아니지만 주인의 집에 잔치가 있거나 하면 불려가서 일을 해 주어야 합니다. 하루 종일 일해도 품삯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심이 후한 주인이라면 남은 음식을 조금씩 사람들의 손에 들려 보낼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엄마 없이 굶주린 아이들이 그것을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애절한 마음으로 주인의 손길을 바라보는 그 눈길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두 맹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찬양도 하고 연보도 하고 기도고 하고 설교도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과연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런 심정입니까? 사람들이 많으니 여러 가지로 불편합니다. 자리도 부족합니다. 식사시간도 불편합니다. 지난주에 수원에서 여섯 분이 오셨습니다. 제가 전도회 회장 모임이 있어서 식사하시라고 하고 목양실로 갔습니다. 나중에 나가보니 창가에 서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밥을 못 먹어 그런 것도 아닌데 내가 이르려고 수원에서 창원까지 왔는가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마음이 드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는 자세는 이 맹인들의 모습입니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이 가난한 심령입니다.

 

시편 131편입니다.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말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자궁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즉 어머니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라는 말은 한문이고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한글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어린 아이가 어머니가 없으면 못 산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마치 종이 주인의 손길을 바라보듯이 어린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있는 것이 긍휼 안에 있는 모습입니다. 젖을 배불리 먹고 어머니 품에 있는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상태를 구원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긍휼이 시편만이 아니라 이미 모세를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1~3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모세가 목숨을 건 중보로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대로 약속의 땅에 들여놓기는 하겠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목은 곧은 백성이기에 내가 함께 가면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심하면서 단장을 하지 않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장식품을 떼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장신구를 사람들이 왜 차고 있습니까? 자신들을 장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와 앞에서 온갖 장신구를 갖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치장들을 다 떼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33:13~19절입니다.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모세에게 보이신 여호와의 영광이 은혜와 긍휼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긍휼을 다윗이 너무나 잘 압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그 왕위를 영원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으로 인하여 다윗이 비록 범죄 할지라도 자신의 언약의 신실함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의 어떠함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의 신실함을 은혜와 긍휼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9:1~7절입니다.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1)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가 오시면 다윗의 왕좌에 앉을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그 메시아로 오시는 분이 한 아기로 오시는데 한 아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의 어깨에 정사를 메고 그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입니다. 그 나라는 영원할 것인데 이것이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흑암에 행하던 자들이 빛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이 마태복은 앞부분에서 찾아 본 말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멸시를 받은 스불론과 납달리와 갈릴리에서 먼저 사역을 하십니다. 그곳에 빛을 비추시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두 맹인이 눈을 뜨게 하시는 사건을 통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 것입니까?

 

누가 맹인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면 눈을 뜬 자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면 맹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찾아본 대로 본다고 하는 자는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본다고 하는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며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본다고 여긴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율법을 보고 지키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맹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들 맹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직전에 두 맹인이 예수님을 주와 다윗의 자손을 고백한 것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사람들, 곧 성전이 있고 율법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그 예루살렘이 눈 먼 자들의 도시임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3:37~39절입니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든 율법과 제사와 절기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인데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됩니다. 언제까지 그래야 합니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 까지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만 비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누구신지 알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자들만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긍휼을 입은 자들은 예수님을 주와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 받는 복입니다.

 

히브리서 4:12~16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모일 때 마다 이렇게 말씀을 보고 듣는 것은 말씀의 검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의 생각들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들의 공적으로 자신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피하여 들어갑니다. 이것이 긍휼을 입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그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멸시를 하고 조롱을 할지라도 두 맹인처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마음이 낮추어져야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두 맹인에게 임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눈을 떠서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자인지를 알게 되어야 주의 긍휼만의 구하고 주의 긍휼만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