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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4 아비들아! 2014. 2. 2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들이 아비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해서 지금의 아버지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지금 자신이 아버지들이 아니라고 해서 오늘 아버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인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이 다가 아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도 다만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주시는 말씀만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야 할 말씀들입니다.


요한일서 2:12~14절입니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여기서 자녀와 아비와 아이들이 특정한 나이의 계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합니다. 이번 명절에 우리의 자녀들이 아버지라는 분들에게 들은 덕담들이 어떤 것입니까?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아비들이 자녀들에게 들려준 덕스러운 이야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아비들이 자녀들에게 전하여주어야 할 말씀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4절을 보시면 아비들을 부릅니다. 물론 일차적인 의미는 자녀를 둔 부모를 말합니다. 그런데 왜 부모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아비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개념은 우리의 문화에서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아비는 자녀를 낳은 자입니다. 그러면 양육은 어머니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아버지란 히브리어에서 ‘아버지의 집’이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씀’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는가 하면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받는 일차적인 독자들의 환경은 아버지가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아이들을 처벌하는 정도가 아니라 신생아를 살해하고 유기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혁명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와 정 반대의 현상입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녀를 신으로 섬기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나 이 시대나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여야 합니까?


먼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녀들이 어떤 때에 분노합니까?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부모의 욕망을 자식에게 투영시키고자 할 때에 분노합니다. 부모는 부모이고 자신은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한다는 것은 부모의 사사로운 세상의 욕심들을 부인하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도 자녀를 학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를 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욕망을 위하여 매를 들면 자녀가 노여운 것입니다. 장로와 권사이기에 또는 목사이기에 나의 자녀는 세상에서 이러한 지위를 얻어야 한다는 그런 욕망들이 자녀를 노엽게 합니다. 그런데 나의 사욕이 아니라 주의 교훈과 훈계임에도 아비의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들어서라도 양육해야 합니다.


잠언 13:24절입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부모가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매를 든다면 그것이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가지고 내가 세상의 것을 성취하라고 매를 드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일에 소홀히 한다고 매를 드는 부모가 있습니까? 학교 가지 않고 학원에 가지 않는다고 혼을 내는 경우는 있어도 예배시간에 빠진다고 매를 드는 부모가 있습니까?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를 드는 이유가 부모의 자기 체면이나 또는 어려서부터 예배를 잘 드려야 나중에 성공한 사람이 된다는 욕망으로 매를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죽일 정도로 악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교훈과 훈계가 무엇인지 부모들이 먼저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5~11절입니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육신의 아버지도 자기 자식을 징계합니다. 심지어 자기 욕심을 위하여서도 그렇게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 거룩하심에 참여시키시기 위하여 신실하게 징계하십니다.


지난주에 본 신명기 6:4~9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지난주에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로 이 본문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자들이기에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은 심지어 부모가 마을의 사람들에게 고발하고 그 자녀를 돌로 쳐서 죽이라는 말씀도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0~20절의 말씀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약속하신 땅을 주십니다. 그 이유는 10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주신 언약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하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자신들이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는 것이며, 자신들이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셔서 배불리 먹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그 말씀만 순종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경험과 광야와 가나안 입성의 경험이 없는 후손들이 자라나서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물을 때에 무엇을 말할지 봅니다.


20~25절입니다. “20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1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2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3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이스라엘의 아비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으로 양육하여야 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언약을 어떻게 하셨으며 그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내셨는지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을 믿고 그 언약 안에 거하는 것이 너희의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왜 다른 사람들이 공휴일이며 일요일이라고 말하는 이 날에 놀러가지 않고 교회로 가서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께 예배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야합니까? 자기들이 경험한 여러 가지 종교체험들을 전하여 줄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경험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내시는 분이신지 성경을 통하여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6:10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들이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에 올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430년간이나 종살이 할 것도 역시 생각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이라고 하시면서 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통하여 오늘 믿음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 보겠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다른 신을 섬기든 사람이었습니다(수24:2).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아브람도 다른 신을 섬기는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비 데라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지은 것은 큰 아버지가 되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아브람은 첫 번째 아버지 또는 큰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데라가 이런 이름을 지은 것은 세상에서 큰 자가 되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후에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란 말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인데 이 아브람과 아브라함에 들어가는 공통된 말이 아버지라는 ‘알렙’과 ‘베이트’입니다. 아버지의 집이라는 뜻이 아버지입니다.


이스라엘이 국가로 출범하는 것이 출애굽으로 시작이 됩니다. 이스라엘 국가로 출발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전부다 하나님의 언약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 말씀대로 자신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이 하나님의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언약하신 그 땅과 씨에 대한 약속으로 인하여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땅과 씨의 약속의 성취는 이 역사 속에서 천년 뒤에 다윗을 통하여 땅을 차지하고 이천년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씨와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마태복음 1:1절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 아버지란 하나님의 약속을 전달하는 자가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어려서는 자녀였습니다. 이 자녀가 자라서 아버지가 되려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어야 합니까? 생물적인 자녀와 아버지의 구분이 어떻게 됩니까? 어린 아이는 씨가 없습니다. 청소년이 되면 씨가 생산이 됩니다. 아비란 그 씨를 낳은 자가 아비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물학적인 아비가 책임도 없이 씨를 뿌려서 유기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비가 되려면 아비의 책임이 어떤 것인지 교육을 해야 한다는 말도 많이 합니다. 세상에서도 이러한 아버지의 책임이 있는데 믿음의 세계에서는 어떤 책임이 있는 것입니까?


먼저 씨가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씨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이 이삭은 없는데서 나온 자녀입니다. 잉태하지 못한 여자에게서 나온 자식입니다. 아예 생리마저 끊어진 상태에서 나온 자식이 이삭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99세에 할례를 행하고 나온 자식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아버지의 역할은 그 씨가 어떻게 배태되고 출산되고 전달되는지를 알고 전하는 자가 아버지입니다. 단지 생물학적인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를 어떻게 만들어 내시는지를 전달하는 자가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이 아버지의 역할을 신약에서 어떻게 하는지 봅니다.


고린도전서 4:14~16절입니다.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린도 교회에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한 것은 마치 아비가 자녀를 낳듯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여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여러 가지 은사들로 인하여 교만하여지고 파당이 나누어졌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자신의 아들 디모데를 보낸다고 합니다. 디모데를 주 안에서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주 안에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6절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서 자손이라고 번역된 말이 ‘씨’입니다. 그 씨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영으로 들어오시면 그것이 우리의 씨가 되기에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씨를 자기 자녀들에게 심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고 나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이 아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회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선 것은 아버지의 약속을 버리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그들의 의로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주의 계명들을 순종할 수가 없기에 이미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이란 바로 땅과 씨에 대한 약속이었으면 그 땅과 씨란 바로 그 아버지의 집의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누가 아버지입니까? 육신의 부모는 자신의 씨를 넘겨줍니다. 믿음의 아버지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씨 예수 그리스도를 배태하여 출산하는 자들이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사람이 먹어야 하는 것은 씨를 맺는 풀과 씨를 맺는 과일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바로 그 씨를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씨를 받은 자는 자녀입니다. 그 씨를 받은 자녀는 그 씨를 해산하게 됩니다. 그 씨란 복음입니다(벧전1:23~25). 이것이 복음의 증거이며 이것이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는 무엇을 자녀들에게 전달하겠습니까?


신명기 6:20절에서 후일에 자녀들이 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물으면 아비가 할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언약하신 그 내용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어서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우리를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이 약속의 땅에 들여놓았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그림자입니다. 이제 실체가 나타났습니다. 그 실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완성하시고 그 의를 선물로 주셨다고 전달하는 것이 아버지의 일입니다.


이런 아비들은 자기의 행함이나 자기의 가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았는데 어느 날 환난이 닥치고 나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살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하시더니 어느 날 복음이 들리고 예수의 십자가가 보이더라는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 예수의 십자가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자녀들이 물으면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자녀들에게 의와 지혜와 거룩함이 주어진다는 말을 하는 아버지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