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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6:17-21 다 되었다 2009. 12. 20

 

17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18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없더라 21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일곱째 대접이 쏟아집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숫자는 완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지 창조를 6일 만에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칠일 째는 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칠일을 복 주시고 사람에게도 6일은 일하고 7일째는 안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안식의 연장선상에서 행하는 에덴동산에서의 일은 범죄하고 난 이후의 노동과 전혀 다른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범죄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짐승들의 이름을 지으며 피조물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에 참여된 감사와 기쁨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안식을 깨뜨리는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납니다. 뱀의 유혹을 받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합니다. 이제부터의 노동은 벌이 되었습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자기의 생존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참된 안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은 생존의 조건을 위하여 더 많이 노동하여야 됩니다. 여기서 소유가 발생하고 소유에 따라 계급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지 못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실패가 없으시기에 이런 처음 창조는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와 안식이 무엇을 위한 창조와 안식인지를 보여주는 배경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참된 창조와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고후5:17). 그렇게 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천지만물이 지어졌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골1:16). 그래서 만물이 주로부터 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롬11:36).

 

이 안식에 대하여 조금만 더 살펴봅니다. 히브리서 4:1-13절입니다. “봉독” 인용본문으로 조금 길지만 창조의 완성이 안식이라고 하였기에 이 안식을 보아야 심판이 무엇인지도 아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날짜의 문제가 아니라 이 안식일에 들어가는 것이 숫자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 창조의 완성인 참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참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을까를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 전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믿음이란 자기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이기에 자기의 믿음을 자랑하지 못하고 믿음 주신 분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은 창조 때부터 이루어진 일이며 이 안식에 들어갈 자가 있고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완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다 이루심입니다. 왜 이것이 다 이루심입니까? 이 십자가로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다 이루신 것이며 창조의 완성도 이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확정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묵시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란 이 다 이루심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17절을 봅니다. 표준 새 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다가 쏟으니,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다 되었다" 하는 큰 음성이 울려 나왔습니다.”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곱째 대접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7이란 완성을 말씀하시는데 천지 창조의 완성만 7이란 숫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도 7이란 숫자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종 심판인 일곱 대접 속에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최종적인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기에 ‘다 되었다’는 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대접은 쏟는 곳이 공중인데 이 공중이란 사단이 하늘에서 쫓겨나서 거하게 된 처소입니다. 에베소서 2:2절에 보면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 숨 쉬는 공간입니다. 즉 대기권 안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도 공중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공중에 일곱 번째 대접을 쏟아버리는 것이 마지막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중에 심판의 대접을 쏟아 붓기 전에 무엇을 먼저 선포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4:6-7절입니다.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면서 영원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어떻게 전하는 것입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회개하는 것입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으니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녔습니까? 나를 위하여 다녔습니까? 복 받기 위해서?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서? 그게 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면서 교회 다니는 우리가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있는데 이것을 공중에 날아가는 천사가 전한다고 하니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굶어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국제구호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일이 수송하기가 힘든 곳은 비행기로 양식을 떨어뜨려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양식과 생필품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환호하면서 받아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환호할만한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심판이라고 하는 소식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복음이 무엇인지 주워서 열어보니 너 나와 함께 십자가에 죽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 복음을 버리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가짜 복음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는 하늘에서 심판의 폭탄을 쏟아 붓는 것이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심판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왜 ‘다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다 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과 심판이 다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확정된 십자가의 사건이 온 세상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비행기가 날아가면서 복음의 폭탄을 떨어뜨리는데 정확하게 구원받을 자에게만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폭탄이 떨어지면 그 사람은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이 죄임을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기의 구원이 된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심판의 폭탄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심판의 폭탄이 떨어진 자는 도대체 회개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당하는 재앙을 보고서도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재앙이 닥치는 것을 보고서도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노인 들이 온천을 하고 오던 관광버스가 굴러서 18명이 죽은 사건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있어서 죽었습니까? 18명이라고 하니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누가복음 13:4-5절입니다.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재앙들이 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삽니까? 저런 재앙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여기며 삽니다. 나는 예수님을 잘 믿기에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여기고 삽니다.

 

이제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이 쏟아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봅시다. 18절입니다.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이런 재앙은 앞에서 일곱 나팔 때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재앙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고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쪽과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재앙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쪽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재앙이 와도 다 피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힘과 능력을 믿습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도와 종교적인 공적으로 재앙을 이기려고 하고 세상적인 사람은 자기들의 경제적인 능력으로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그마한 재앙들은 넉넉한 보험을 들어놓으면 어느 정도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큰 지진이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천재지변은 보험도 해결하여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일곱째 대접이 쏟아지는 때에 지진은 얼마나 큰지 이 땅에 사람이 있은 이후로 이만한 지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시면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이 무어지는 것입니다.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것은 지구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니 각 섬이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가 없어집니다.

 

21절에는 우박 재앙이 쏟아지는데 우박이 한 달란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각주에 보면 약 백근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박 하나가 약 60킬로그램입니다. 애굽에 쏟아진 우박이 이제는 60킬로가 되어 온 세상에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우박의 재앙을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회개가 되지 않는 심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재앙들을 보면서 지금 회개가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기의 부끄러움이 가려진다면 종말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지구의 내부는 용암이 들끓고 있는 불덩어리입니다. 이런 불구덩이 위에 판 대기 몇 개 걸쳐 놓고 그 위에 살면서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면서 삽니다. 필리핀에 폭발한 화산에서 다시 연기가 솟아오르자 강제로 피난시키고 있습니다. 백두산과 한라산도 다 화산폭발로 된 산입니다. 백두산에는 지금도 뜨거운 물이 솟아오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지진의 빈도와 강도가 많아지고 세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지구를 보면서 우리를 무슨 생각을 해야 하십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생각이 납니까? 나는 이런 재앙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런 소식을 보고 들으면서 역시 주님의 말씀대로 되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차가 고장이 나서 덜덜거리면 이 차 다됐다 그러지 않습니까. 사람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곳에 살아도 다됐다 할 때 가 옵니다. 저도 이제 오십이 되니 작은 글씨가 보이지 않아서 돋보기를 써야 하나 말아야 하는 중에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다 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늘 다 되었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다 되었다’는 말이 여러분은 듣기에 어떻습니까? 저는 세상의 흉흉한 소식들이 들릴 때 마다 다 됐다! 다 됐다! 이러고 사는 것입니다. 군에서 근무하는 병사에게 제대가 다 됐다는 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수형생활이 끝났다는 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죄와 악이 가득한 세상, 수고와 슬픔뿐인 세상에서 다 됐다는 소식이 불안하고 염려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험을 치른 자가 합격 명단을 보고서 이제 시작인데도 다 됐다고 외칩니다. 이처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실패와 성공에 상관없이 ‘다 되었다’고 하면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