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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1:11-24 바울 복음의 기원 2011. 10. 16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박영선 목사의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대담형식의 책에서 자신에게 절망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였다고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학대하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자신에게 절망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확신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자기 확신에 가득하였는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빌3:6). 그 정도로 바울은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자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이며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진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란 자신들만은 천국에 들어갈 정도로 완벽하게 율법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자신들의 탐심 하나 다스리지 못한 자였음이 예수님 앞에서 드러났습니다.

 

마태복음 19:16-30절입니다. “봉독”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자신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더 부족하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 하려고 하면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쉽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놀라서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느냐고 물으니 예수님은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십니다. 즉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바울을 통하여 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대인들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를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이 있을 수가 없다고 여긴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알고 이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아주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일에도 주동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메섹에 사는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잡아오기 위하여 대 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26:1-23절에서 자기가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합니다. 대낮에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비추자 놀라서 말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같이 가던 자들은 천둥소리를 들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네가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고 하십니다. 이때 사울이 주여 당신이 누구시냐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울을 부르신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택한 주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눈이 멀게 되어 아나니아라는 선지자를 만나 안수를 받고 눈이 뜨여졌습니다. 이런 내용을 요약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11-12절을 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 나타나서 여러 가지로 바울을 폄하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복음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당시에 많은 순회 전도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그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16-22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바울 속에 예수님을 나타내셨을 때에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바울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왔는데 그 기간이 약 삼 년이 걸린 것입니다. 이곳으로 전도하러 갔다는 사람도 있지만 바울은 전도도 하였겠지만 바울이 받은 그 복음에 대한 확증의 기간이라고 봅니다. 모든 구약의 말씀 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지를 친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배운 것입니다. 이렇게 삼년이 지나고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는 방문하고 십오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도들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바울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그렇게 확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며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속에 나타내셨기에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람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람에게서 일어날 수 없는지를 사람들에게 배우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방금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어느 정도로 자신이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사람인지를 다음의 말씀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13-14절입니다.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사도행전 26장의 말씀처럼 자신은 유대교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멸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로 피로 값을 주고 구속하신 성도들을 말합니다. 얼마나 열심인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열심이었으나 그 열심으로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15-16절입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였다고 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창세전에 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택한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에 자신에게 원인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살인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신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있습니다. 아니 어머니 태로부터 작정하셨다면 태어나면서부터 성령이 충만하게 태어나서 착하고 바르게 살다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서 전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직업이 의사니 판사니 변호사니 고위 공무원이나 기업체 사장이 되어서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직업에 들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수많은 경쟁을 하면서 남을 누르고 이겨야 되는 일인데 그런 자들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니 목사들이 이렇게 성공하였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면 자식들이 이렇게 복을 받는다고 하면 부모들이 목숨을 걸 정도입니다. 그런 간증들을 하면서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면 어린 애들을 깨워서 강단위에 가득 채워놓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가지기를 원하지요! 저도 여러분의 자녀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우리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같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까? 이러한 세상의 행사들을 악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바울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모태로부터, 창세전에 택한 자인데 왜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살인까지 하도록 내버려두셨다가 불러서 자신의 증인으로 삼으시느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선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라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는 악이라는 사실입니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바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여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결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의 실체입니다. 이런 모습을 바울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12-17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셨답니다. 그러니 바울 같은 죄인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그런 죄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어떤 본이 됩니까? 나 같은 죄인중의 괴수도 예수님은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피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런 죄인도 용서 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17절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본문 23-24절입니다.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하니 이것은 결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이렇게 사람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떻게 바꾸어 놓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인하여 바꾸어 놓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로 모였는데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이 아니라 교회 성장지상주의의 말을 듣거나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세상의 복을 받는다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듣는다고 자동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 또한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의 능력이 아니라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복음을 들을 귀를 주셔야 믿게 됩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자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들은 각자의 삶의 모습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의 인생을 간섭하셔서 이곳까지 왔는지 다 모릅니다. 각자가 여러 모양으로 열심을 내다가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들이 이곳에 왔을 것입니다. 멀리서 설교만 들은 사람들은 늘푸른 교회에 오고 싶어 합니다. 도대체 늘푸른 교인들은 어떻게 신앙생활 할까를 궁금해 합니다. 창원으로 이사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 등록하고 보니 늘푸른 교회가 어떻습니까? 이곳도 절망입니다. 절망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만 뚜렷하게 보이는 죄인중의 괴수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