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3~8 시작부터 끝까지 2018. 1. 14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본문 3~4절을 봅니다. 바울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인사말을 한 후에 제일 먼저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감사와 기쁨이 얼마나 많았는지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 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구할 때 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뻐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약 20년을 설교했는데 들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드러나지 않게 계시지만 힘들 때에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 주시고, 밥이라도 한 그릇 사주면서 자신이 아무른 힘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 지하에서 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이곳으로 이사할 때에 어떤 분이 출장으로 몇 년 있다가 서울에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도 상당한 금액의 연보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월 적지 않은 선교헌금을 10년째 보내고 있습니다. 기부금 증명서를 우편으로 보낼 때 마다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곳의 모임에서 인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몇 사람이 감당을 합니다. 제가 교회의 주소록을 보면서 기도를 할 때 주소록에 없지만 이분들이 함께 생각이 납니다.

 

5절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참여했다는 말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서로 교제한다는 말이지만 이 교제가 거저 말로만의 교제가 아니라 연보를 보낸 것입니다. 여기서 첫날부터라는 말은 빌립보교회가 마게도냐의 첫 교회입니다. 지난주에 본 대로 바울과 실라가 이 지역으로 전도하러 간 것은 예수의 영이 이끄신 것입니다. 아시아로 가려는 길이 막히고 마게도냐 지역에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간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주색 옷감 장수 루디아를 만나고 루디아가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간수가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빌립보 교회가 생성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사역에 연보를 보낸 것입니다. 바울이 처음에 파송 받은 곳은 안디옥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1차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일로 다툼이 일어나 헤어집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마게도냐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에서 후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처음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이란 빌립보 지역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고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게 갔을 때에도 두 번이나 연보를 보냈고 지금이라는 것은 로마의 감옥에 있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빌립보 교회가 부요하여 바울에게 연보를 보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로마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면서 바울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로마시민이라는 말을 듣고 풀어주기는 하였지만 빌립보에서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에서든 데살로니가에서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핍박을 받습니다. 상인조합과 같은 곳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배척하면 장사 길도 막히기에 환난과 가난이 오기 마련입니다.

 

고린도후서 8:1~5절입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고린도 교회에 알립니다. 아마 이런 은혜를 받기를 싫어할 것입니다. 어떤 은혜를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것입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은 연보를 넘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마게도냐는 첫 교회가 빌립보이고 그 다음으로 데살로니가와 뵈레아와 같은 곳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 당시의 교회는 몇 명에서 많아도 몇 십 명이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환난과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의 상황에서 연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고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성도를 섬긴 것입니다. 이러한 연보는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였습니다. 이런 은혜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좋은 것만 은혜라고 여기지 이런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이러한 형편인데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데 빌립보에서 에바브로 편으로 연보를 보낸 것입니다. 이러한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구할 때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만 드리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이 좋아서 이렇게 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연보를 보냈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이런 말을 한다고 연보를 보내라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은 모든 일에 처할 수 있는 일체를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인사를 하는 것은 그들이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4:17).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은혜를 누가 시작하셨고 누가 이루시는지 그 근원을 성경은 꼭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지난주도 보았습니다만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로 간 것은 성령의 지시로 간 것입니다. 성령은 곧 예수의 영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 루디아의 마음을 하나님이 여셔서 복음을 듣고 믿게 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착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이란 다음 주에 좀 더 상세하게 보겠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가 복음을 받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바울의 복음 사역에 참여하는 것도 누가 시작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니 지금까지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5~6절을 읽어봅니다. “봉독 만약 5절만 있다면 빌립보 교인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8장에서 본 것처럼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중에 있으면서도 힘에 지나치도록 자원하여 연보를 한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에 사람의 힘으로 연보를 했다면 자기 자랑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자랑이 아니라 넘치는 기쁨이었다고 합니다. 복음에 협력하는 일을 이렇게 기쁘게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주는 능력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께서 간수의 마음도 여신 것입니다. 자살하려고 하다가 복음을 듣고 온 가정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소식이 어떤 소식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는 것은 3~6절의 내용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확신이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하여 확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바울의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내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은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면 보혜사를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니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한 성령을 받았기에 바울과 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복음을 변증하고 확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빌립보 교회가 함께 참여한 것을 은혜에 함께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아 복음에 협력하는 자들을 바울사도는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4:3).

 

본문 8절입니다. 바울사도가 빌립보 교회를 사모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이 진실임을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 정도가 된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빌립보서 25절에서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서로 통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모이면 감사, 기쁨, 은혜가 자연스럽게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아직 안되셔서 염려가 되십니까? 그러나 너무 염려 마십시오! 이 일을 시작하시고 끝내시는 분이 계십니다.

 

다시 본문 6절을 봅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아직 시작이 안 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시작이 되기는 했는데 침체가운데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작하셨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시는지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처럼 환난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1:1~4절입니다. “1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말하라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 2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냐 열국을 그의 앞에 넘겨주며 그가 왕들을 다스리게 하되 그들이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같게 하매 3 그가 그들을 쫓아가서 그의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이사야 44:1~8절입니다. “1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 나는 1)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5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2)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 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 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 8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

 

구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목이 곧은 백성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듣지 않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 망하게 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내십니다. 이러한 전체의 내용을 이사야서의 이 한 곳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어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별명이 시작과 끝입니다. 시작과 끝이라는 말은 계획과 시행과 과정과 결론까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태에서부터 지어낸 너를 구원하여 내시는 하나님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증인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시작하시고 끝을 내시는 분이심을 이 두 곳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신약에서도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로마서 11:32~36절입니다.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3)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증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불순종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율법을 받았지만 이들은 불순종 함으로 결국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망한 곳에서 다시 돌이키신 것은 불순종 아래 가두어 두심으로 오직 긍휼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나 깊어서 헤아릴 자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한 자만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과는 누구도 거래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처음과 과정과 끝이 다 주의 일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영광입니다.

 

요한계시록 1:8절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1절부터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우리 죄에게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 삼으신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리하여 말씀하지 않고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주님께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시며 전능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시작하시고 끝내시는 일에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17~19절입니다.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사도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를 가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지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복음은 갇히지 않습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뵙고서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으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처음이며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입니다. 전에 죽었지만 지금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이분이 세세토록 살아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알파와 오메가 되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분이 모든 일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6~7절입니다.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시면서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분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3~14절입니다.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가 시작하고 자기가 끝내려고 합니다. 자기가 시작하지 않은 일은 가로채서라도 멋지게 끝내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을 회개하는 것이 주께서 입혀주신 의의 세마포 옷을 빠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보면 처음과 끝 시작과 마침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습니다. I am Alpha and Omega, the first and the last, the beginning and the end.

 

그 처음과 그 마지막이며 그 시작과 그 마침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것을 예수님께서 끝까지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 다 이루심을 지금 이 역사 속에서 이루고 계십니다. 지금 다 이루심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예수님은 이미 다 이루셨습니다. 이런 믿음은 성령이 임함으로 주어집니다. 이러한 자들은 빌립보 교회처럼 환난과 핍박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어도 기뻐하며 소망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그 처음과 그 마지막이며 그 시작과 그 마침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