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1~13 열 처녀 비유 2017. 7. 30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지난주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주인이 시키시는 대로 잘 순종하며 사셨습니까?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답을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 있게 대답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혈과 육으로 열심히 헌신충성 봉사하여 이만하면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고 살았기에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은 일등으로 메시아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입니다. 자기는 성전에서 따로 서서 기도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면서 자신은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까?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바리새인은 그동안 행한 이런 수많은 일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한 외식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본 마태복음 24:51절을 보면 악한 종이 어떤 벌을 받게 됩니까?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 악한 종이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 일에 게으른 그런 자들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연결하여 보면 가장 열심인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심과 헌신과 충성과 봉사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면 외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예수님은 얼마나 저주를 하셨는지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하느냐 사람 앞에서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라면 그것이 다 외식이기에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결국 자기사랑과 자기 자랑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였지만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등불만 준비하면 안 되고 기름도 준비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기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들을 합니다. 성령이라고도 하고 헌신 충성하면서 깨어 있는 모습으로 기름을 채워야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신랑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사람의 준비함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그동안 살펴본 수많은 천국 비유들은 결국 두 무리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무리로 영원히 갈라지기 전에는 함께 섞여서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13:47~50절입니다.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가지 천국의 비유는 갈라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읽은 이 말씀은 천국을 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그물을 쳐 놓고 물고기가 가득하면 물가로 끌어내어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을 버립니다. 세상 끝도 이렇다고 하십니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면 거기서 울며 이를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비유에서 좋은 물고기는 의인이며 못된 물고기는 악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의와 악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어부라면 어떤 물고기를 그릇에 담겠습니까? 돈이 되는 물고기입니다. 옛날에는 아귀가 잡히면 재수 없다고 바다에 텀벙 던져버렸답니다. 그래서 아귀 물고기 이름을 물 텀벙 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귀하게 대접을 받습니다만 우리에게 좋은 것은 돈이 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못 된 것은 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부라고 보면 예수님의 그릇에 담긴 물고기들은 어떤 물고기들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이 담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릇은 긍휼의 그릇이기에 자기가 스스로 잘난 자들이라고 하는 자는 담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긍휼을 드러낼 자들만 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였는데 누가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의롭다고 자기 행위를 자랑하며 세리와 비교하면서 기도한 바리새인이 못된 물고기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죄인이라고 한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천국의 비유에서 갈라짐의 분기점은 바로 의의 문제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자기를 치장하는 자들은 율법주의든 세상의 윤리도덕이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못된 물고기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이 은혜이며 긍휼입니다.

 

우리는 열 처녀 비유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등불만 드는 것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만이 아니라 남편과 자식들 까지 들들 볶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참된 안식과 감사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늘 불안하고 노심초사하였다고 합니다. 열심 있는 선교단체에 속하여 활동도 했습니다. 여름휴가를 보름 정도 내어서 전액 자비량으로 9명이 팀을 이루어 하나님의 음성 듣는 훈련을 하면서 전국을 다닌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이 복음을 듣고 달라졌다고 합니다. 자신의 노력이 아닌 은혜여야 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주의 이름으로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였지만 주님은 그날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명의 처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합니다. 이 처녀는 신부의 친구들로서 신랑이 올 때에 등불을 들고 맞이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고 합니다. 미련한 자는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슬기 있는 자는 기름을 준비하여 등과 함께 가졌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습니다. 슬기 있는 처녀는 깨어있었고 미련한 처녀만 잔 것이 아니라 다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맞으러 나가려고 보니 등불이 꺼져갑니다. 슬기로운 자는 기름을 채워서 갈 수 있는데 미련한 자는 기름이 없어서 나누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슬기로운 자가 나누면 둘 다 부족할 것 같으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 오라고 합니다.

 

여기서 슬기로운 처녀들이 참 냉정하다고 생각되는 분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 문제는 인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내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남편은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자기는 아내의 치맛자락 잡고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때는 의인과 악인이 영원히 갈라지는 순간입니다. 그 때에 준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면 아직도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이 미련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미련한 자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지금 교회당에 다니면서도 세상이 좋아서 세상의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기름을 사기 위하여 밤중에 달려갔으니 얼마나 시간이 지체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이 기름을 사오는 시간에 신랑이 왔습니다.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런데 신랑이 대답하기를 진질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대단한 일들을 했다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미련한 다섯 처녀를 두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곳에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자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하는 방법론으로 교회에 열심을 내게 하거나 자기들 단체나 특정 교주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바로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자가 됩니다. 그러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무엇을 준비한 것입니까? 우리는 자꾸만 사람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일과 행위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마지막 말씀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그 날과 그 때를 예측하여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늘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기다리게 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왕과 백성, 목자와 양, 신랑과 신부로 표현을 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신부로 삼았다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신랑은 바람을 피우지 않는데 신부가 늘 바람을 피웁니다. 그러나 신랑이 되신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시기에 그 바람난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신랑을 두고 바람을 피워서 술집에 팔려간 고멜을 호세아는 값을 주고 사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는 이스라엘을 버림받은 여자아이로 묘사합니다. 탯줄도 자르지 않고 버림받은 아이를 살리시고 먹이고 입히셔서 공주처럼 키워서 자신의 신부로 삼았지만 얼마나 바람을 피우는지 창녀는 돈을 받고 몸을 파는데 이 여인은 돈을 주고 남자를 사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하나님의 남편 되심과 이스라엘의 아내 됨을 말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9:14~15절입니다.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이미 혼인잔치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잔치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잔치를 조롱하면서 예수님이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잔치를 열고 계십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온다고 합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십자가 지기 전에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20절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결혼이란 부부일심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로 인하여 아무리 결혼하여 함께 살아도 일심동체가 되지 못합니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왔습니다. 타락 전에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지만 타락 이후에는 단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 깨어진 관계를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어 내십니다. 그래서 그 옆구리에 창이 찔리시고 물과 피를 쏟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자기 신부를 구속하셔서 자신과 하나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영원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셨듯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신 것처럼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한 자만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어떤 죄인 인줄 압니다. 이런 자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부될 자격이 전혀 없는 자임을 압니다. 그런데 전적으로 신랑의 희생으로 신부됨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가지에 붙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말라죽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세상의 죄의 의와 심판에 대한 개념들이 책망을 받습니다. 이렇게 책망을 받는 자들은 자기 행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들이 신부이며 이들은 자기가 아무 것도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는 자가 신부입니다.

 

요한복음 17:21~24절입니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창세전에 아들의 희생으로 자기 신부를 구하실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임하게 된 사람이라면 이 놀라운 창세전의 계획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이라는 것들이 헛된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가졌던 그 놀라운 영광을 자기 피로 구속한 자기 신부들에게도 보여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랑 되신 예수님이 아버지께 신부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20~22절입니다.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하나님의 자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아멘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약속을 이루심으로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기름부음이라고 합니다. 이 기름부음 곧 성령이 임하심이 그 마음에 인을 치시고 보증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4~5절입니다.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말씀하시지만 이것도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성도를 신부로 보시면 됩니다. 신부된 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탄식하지만 신랑을 다시 만나게 되면 그 신랑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게 되는 그 날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다는 보증금입니다. 약혼으로 말해도 됩니다. 이 약혼은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라면 하루라도 빨리 신랑을 보기를 원할 것입니다. 자신의 선물보따리 들고 나가는 신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나를 신부 삼으신 그 사랑의 실체는 만나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입니다.

 

베드로전서 1:7~9절입니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었다고 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 피 뿌림을

얻은 자는 세상에서 연단을 받습니다.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지위를 다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신랑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9:7~8절입니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열 처녀 비유에서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준비가 우리의 종교적인 업적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죄를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준비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살기 괴로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부요에 처하든지 가난에 처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그 십자가로 나타난 사랑을 알기에 주님이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이미 하늘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시간을 빼 버리면 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자와 참여하지 못한 자가 이미 영원히 갈라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미련 같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을 아신다면 미련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이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미 하늘에서 완성된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이 기록된 말씀으로 보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어린 양은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준비가 무엇입니까? 그 아내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수동태입니다. 내가 만들어 입은 옷이 아닙니다. 이 세마포 옷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은혜가 임한 사람이라면 신랑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신부로 준비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