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27~28 회칠한 무덤 2017. 4. 23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여섯 번째 화 있을진저! 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본 표리부동의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자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이 미움을 받을 만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러한 미움 받을 일들로 인하여 배척을 받고 고난을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겉과 속이 같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사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은 삼대절기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 합니다. 유대 땅 안에 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흩어진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으로 몰려옵니다. 거룩한 성전에 가려면 부정함을 입으면 안 됩니다. 무덤은 그 자체가 부정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은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유월절 전에 회칠을 하여 둔다고 합니다. 그렇게 회칠을 하여 두면 무덤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런 곳에 접촉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가는 일에 지장이 없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덤에 회칠을 하라는 규례는 없지만 무덤에 닿아서 부정함을 입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마련한 것입니다.

 

민수기 19:11~22절입니다. “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12 그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13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14 장막에서 사람이 죽을 때의 법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 장막에 들어가는 자와 그 장막에 있는 자가 이레 동안 부정할 것이며 15 뚜껑을 열어 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은 모두 부정하니라 16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17 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깨끗하게 하려고 불사른 재를 가져다가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18 정결한 자가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을 찍어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19 그 정결한 자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그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일곱째 날에 그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그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저녁이면 정결하리라 20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21 이는 그들의 영구한 율례니라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린 자는 자기의 옷을 빨 것이며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2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민수기 19:1~10절은 부정하게 되는 자들에게 뿌릴 물을 준비하는데 그 재료가 온전하고 흠이 없고 멍에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 송아지를 진영 밖으로 끌고 가서 잡습니다. 그 피를 회막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게 합니다. 그 송아지의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릅니다. 불사를 때에 백향목과 우슬초도 함께 넣습니다. 그렇게 전체를 불살라 재로 만들어 정결한 곳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부정함을 입은 자들에게 그 재를 탄 물을 뿌림으로 정함을 입게 하는 것이 속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흠 없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부정함이 정결함을 받는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려야 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어떤 방식으로 정결하게 해야 하는지가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왜 이렇게 사체에 접촉하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죽음에 접촉되는 것은 죽음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정결하게 되는 것은 흠 없고 온전한 짐승의 죽음으로 정결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문자대로 보고 지켜온 유대인들은 이리한 부정함을 입지 않고 성전에 나아가기 위하여 무덤에 회칠을 하여 표시를 하여 둔 것입니다. 부정한 채로 성전에 나아가면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며 회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정함에 접촉하지 않기 위하여 행한 일이 무덤에 회칠을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1:27~30절입니다.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바울이 3차에 걸쳐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오면 고난을 받을 것을 성령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였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왔습니다.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자 흩어진 유대인들이 얼마나 바울을 반대하였는지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을 보고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 헬라인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성전에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는 것으로 보고 함께 성전에 들어갔다고 모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잡히고 결국 로마로 가게 됩니다만 이러한 소동이 민수기 19장의 정결규례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아직 성전이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성전을 더럽혔다고 소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성전을 향하여 무너뜨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였으니 예수님을 고발한 죄목이 성전을 허는 자라는 죄목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에 부정함을 입지 않고 들어가기 위하여 무덤에 회칠을 하는 그 모습을 보시고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속에는 온갖 더럽고 부정한 것이 가득한데 겉만 칠하는 것이 저주 받을 짓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외식하는 것이며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을 먼저 깨끗하게 하면 겉도 깨끗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안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로 몸을 씻을 수는 있지만 어떻게 속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남전도회 모임에서 저에게 어떻게 복음을 알게 되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종종 말씀드렸지만 처음 들으시는 분이 계시니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잘 수납을 안 합니다. 그래서 어려서 교회 다닌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지옥이 무서워서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자 교회에서 상을 줍니다. 학교에서도 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좀 착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청소년이 되면서 죄가 나의 행위로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내 속에서 죄가 나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이 악한 일을 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악한 죄가 나오는 것임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런 모습을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라고 합니다. 나의 존재자체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니 죄를 짓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보니 부정하면 씻으라고 합니다. 시골의 겨울에 목욕탕도 없습니다. 가마솥에 불을 때고 물을 데워서 온 몸을 씻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는 중에 하나님의 열심에 대한 박영선 목사의 창세기 설교를 보고서 신앙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심으로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가게 되고 십자가의 복음의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7~10절입니다.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구약의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막은 제자장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들어갑니다만 지성소는 일 년에 한번 대 속죄일에 피를 들고 가야 합니다. 이렇게 한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보이고자 하신 뜻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서는 하늘 성소에 들어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첫 장막에서 아무리 피를 뿌리고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린다고 하여도 그것이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장막은 비유라고 합니다. 그러면 실체가 와야 합니다. 그 실체가 오기까지 육체의 예법일 뿐입니다. 이러한 그림자와 비유를 실체가 와서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예표요 그림자입니다.

 

이어지는 11~15절입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실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분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않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려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성소라고 합니다. 이것은 피조 된 인간으로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예수님은 자기 피로서 단번에 영원히 이루신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한다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겠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죽은 행실만 나오는 양심을 깨끗하게 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로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실 뿐만 아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잔과 겉만 깨끗이 하는 것은 저주를 받는 일입니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잔과 겉을 깨끗하게 하고 부정함을 입지 않으려고 무덤에 회를 칠하여 표시를 하지만 이렇게 하는 그들의 속이 이미 탐욕과 방탕과 더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이 더러운 속을 씻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실체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수록 경건하고 거룩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자인지 계속하여 폭로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부분에 걸림이 되는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 시간 바쳐 물질 바쳐 행한 모든 것이 다 죄냐고 묻습니다. 그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의 행위가 들어가 있습니다. 은혜로 되었다면 그런 질문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4:10~13절입니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이미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믿음으로 결합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구약의 사람들도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믿음으로 결부시키지 못한 것이라고 히브리서 4: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죽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검에 의하여 우리의 속이 다 해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좌우에 날선 검으로 어떠한 검 보다 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이 드러납니다. 성령이 임하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책망을 받으면 우리의 속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게 됩니다. 겉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속이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 이솝우화가 생각이 납니다. 제우스가 새들의 왕을 뽑는다고 하였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새가 새들이 왕이 된다고 하였기에 모든 새들이 냇가에 가서 자신을 한껏 치장하여 경연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허영심이 많아서 아름다운 새들의 깃털을 모아서 단장을 하였습니다. 제우스가 보니 까마귀가 제일 아름다워서 왕으로 뽑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새들이 자신들의 깃털을 뽑아버리자 그의 본래 까만색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망가야죠! 오늘 우리가 이 까마귀와 같이 온갖 것으로 치장을 하고 나왔습니다. 말씀에 검에 의하여 그 치장들이 발가벗겨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히브리서 4: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이 들통 나는 시간이 설교시간이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못남을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 온갖 외식으로 인하여 가면무도회가 되었습니다. 회칠한 무덤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곳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본색이 드러난 까마귀처럼 정말로 시커먼 나의 속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된 자들은 자신이 자신을 단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에게로 나아갑니다. 이 분이 승천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을 굳게 잡는 것이 우리의 의로움이며 거룩함이며 지혜이며 구원이 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험을 받으셨지만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우리의 죄가 되게 하셔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보좌가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로 가는 자들은 자신의 더러움이 어떤 자인지를 압니다. 가까이 갈수록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압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전적인 은혜만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날마다 그 십자가로 나아가는 자들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