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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23-29 믿음이 온 후로는 2011. 12. 11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오늘 말씀은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가 어떻게 다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승천과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기 이전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은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인데 그 후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아직 그림자로 주어졌기에 분명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오기 전이란 구약 전체를 율법이라는 틀에서 보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22절을 다시 봅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죄 아래에 가두는 그 역할을 율법이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가두어 두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그 의를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나오고 있지만 왜 교회로 나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왔습니까? 아니면 세상살이가 힘이 들어서 생존의 조건들을 충족시키거나 위로받고 사랑받기 위하여 왔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과시하기 위하여 왔습니까?

 

갈라디아서 3:23절을 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고 합니다. 22절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사람들을 매어버리고 가두어 두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24절에서 초등교사라고 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초등교사가 아니라 초등학교에 데리고 가고 데려 오고하는 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수백 년 전에 그리스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글에서 몽학선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중에 플라톤의 법률들이라는 글에서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양이나 다른 변통성 없는 피조물이 목자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이, 이아들은 파이다고곤(몽학선생들) 없이 살수 없으며, 노예는 주인 없이 살수 없다, 모든 길들여지지 않은 피조물들 중에 아이가 가장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들보다 아이가 아직 억제되지 않는 이성이라는 원천을 소유하는 한, 배은망덕하고, 교활하며, 무례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에게는 말하자면 여러 가지 파이다고고이서(몽학선생들)에 메여져야한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몽학선생들은 아직 길들여지지 아니한 이성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맡아서 다루는 자를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철학의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런 몽학선생을 율법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봅니다.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우리를 다 가두어 두고 매어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 까지 묶어두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도 스스로의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법아래 갇혀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체적인 율법이 주어졌지만 이방인들은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대신합니다. 법이나 양심은 스스로 자신을 고소하고 스스로 변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모든 인간이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이 죄인 줄도 모르고 율법을 주면 율법으로 스스로 죄냐 아니냐를 따지게 됩니다. 이방인은 양심으로 그렇게 합니다.

 

로마서 2:12-16절을 봅니다.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율법이나 양심이나 그 역할이 어떤 역할입니까? 서로 고발하고 변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아니하는 사람이나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한 해를 돌아보면서 스스로의 행위를 조사해 봅니다. 예배에 빠진 것, 연보 하지 않은 것, 전도 하지 않는 것, 봉사 하지 않은 것, 이런 식으로 하면 얼마든지 나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떤 변명을 하십니까? 복음이니, 은혜니 하면서 미꾸라지처럼 다 도망치지요! 그것이 바로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부분에 찝찝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송구영신 예배 때 한꺼번에 목돈으로 헌금하는 것으로 때우지 않습니까? 우리는 송구영신 예배도 없으니 그런 기회도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의 이런 모습이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연말에 불우이웃 돕기 좀 넉넉하게 하면서 자기 위안 삼는 것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니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니 나는 나만을 위하여 살겠다고 하면서 나옵니다. 율법아래 있든지 율법이 없이 양심으로 살든지 간에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고발하고 스스로 변호하는 선악과를 따 먹은 죄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스스로의 법으로 선과 악을 조율하면서 살기에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오기 전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도 믿음이 오기 전의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아도 알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5절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온 후로는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초등교사의 역할을 플라톤의 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만 종이 그 일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오고 나면 이제 종에게 메어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었든지 양심의 법으로 살았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온 후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2:20-23절입니다.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지난 금요일 십자가와 새 언약을 공부하면서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아직 세상의 초등학문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친히 가르칩니다(요일 2:27).

 

골로새서 2:1-19절까지 함께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사람의 전통이나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 안에서 주어진 모든 것들이 다 그림자로서 그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이 온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6절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됩니까? 27절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례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세례가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초대교회 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마치 지금 북한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고 수용소에 갇히고 총살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예수 믿는 그 순간 세례를 주어도 됩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이런 핍박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는다고 누가 핍박하지 않으니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는지를 말씀으로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은 성령이 임하여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이 정말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알게 되며 동시에 예수님이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마음으로 믿게 되고 입으로 시인하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시인을 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3:11-14절입니다.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은 이런 말씀에 아멘하게 됩니다. 이런 말씀이 성도에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일체의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합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처럼 여깁니다. 애완용개가 아니라 부정하게 취급되는 더러운 개와 같이 여기는 이방인을 형제라고 하게 됩니다. 종은 말하는 짐승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종이 주인과 하나라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고 하는 이런 혁명적인 발언이 복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유대인 남자의 감사목록 중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할 정도로 여자가 천대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모든 인간관계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시키는 것입니다(엡1:10).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차이를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여자들은 자기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만의 개성이 죽는다는 것이지요! 남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이러합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로 모였습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내가 너보다 예수 잘 믿는 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경쟁이 다 일어납니다. 성경읽기, 성경퀴즈, 암송대회, 찬양대회, 찬양은 주님을 찬양하는데 자기들이 잘 했다고 상주면 그게 주님 찬양이 아니라 자기 찬양이지요! 기도오래하기, 금식 오래하기,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초등학문입니다. 맛보지도 말라고 합니다.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갑니다. 보기로는 지혜롭게 보이지만 이런 모습이 육이기에 육체 쫓는 것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29절입니다. 이제 믿음이 온 후로는 나의 것이라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아직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가지만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고 깨어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부서져야 하리! 더 부서져야 하리! 그런 복음성가가 있지요? 왜 그래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그 텅 빈 자리,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 하나님의 약속인 예수그리스도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없는 데서 있게 되고 죽은 데서 살아나는 방식으로 세워집니다. 이것이 믿음이 온 후에 예수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