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4:9~11 면류관을 보좌 앞에 2020. 9. 27

 

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지난주에 9~11절을 말씀드리지 못하여 오늘 이 부분을 다시 보려고 합니다.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계셔서 보좌에 앉으신 분께 네 생물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 때에 이십사 장로도 보좌에 계신 분께 엎드려 경배하면서 자기의 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드립니다. 전에 번역은 면류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찬양합니다. 우리의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십사 장로란 앞에서 본 대로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자들의 대표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모든 면류관을 보좌에 돌려 드립니다.

 

천국에 가면 상급의 차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천국에서는 상급의 차등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방금 본 말씀에서 모든 면류관을 주님의 보좌 앞에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을 받았다고 하여도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만물을 지으신 분이 주의 뜻대로 사용하신 것이기에 자신의 공로인양 관을 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공적을 따라 천국에서 상급의 차이가 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구원은 은혜이지만 이 세상의 복과 천국의 상급은 행위대로 받는다고 합니다. 중세 가톨릭은 구원에 인간의 행위를 집어넣어서 타락하였는데 개혁교회는 그렇게는 못하니 구원은 은혜이지만 이 세상의 복과 천국의 상급은 자신의 행위 따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도 은혜이며 순교적인 행위도 오직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바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사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바울이 그러한 수고를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일이라고 합니다. 이런 바울 사도도 면류관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면류관을 천국에서 보좌 앞에 돌려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왜 상급차등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말을 하는 겁니까? 그 이유는 오직 은혜라는 것을 강조하면 사람들의 열심을 자극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원리가 성과주의이기 때문에 그런 차등의 말이 잘 먹힙니다.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가려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막고 있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상급의 차이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면 여러 곳의 성경구절을 가지고 반박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자주 들은 말이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들의 영광이 다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15:39~44절입니다.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15 전체가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는데 여기서 인간의 행위를 따라 상의 차이가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해와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들의 영광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땅의 영광과 하늘의 영광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 욕된 것과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과 강한 것,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가지고 상급의 차이를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보았습니다. 순교에 이르기까지 헌신 충성하였다고 하여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 반박을 합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16:27절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하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이런 배경에서 행위대로 갚아주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생각대로 주님을 따르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아확장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죽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대로 갚아주시면 한 명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에 성령을 보내셔서 이끌어 가심으로 구원하십니다.

 

디모데후서 1:9~10절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도 포함이 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와 함께 고난도 받기 위함이라고 합니다(1:29).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 자체가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가 나타났는데 나의 행위의 상급을 내어 놓으라고 말한다면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이것 자체가 은혜라는 상입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켜주시는 분도 주님입니다(12).

 

고린도전서 9:23~27절입니다.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 전하면서 당한 고난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옥에 갇히고 헐벗고 굶주리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세 번 태장을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 지내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고후11). 이러한 일들을 한 것은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모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경주하는 자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지만 성도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 생명과 썩지 아니할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상과 면류관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빌립보서 3:10~16절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2)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부활입니다. 이 부활에 이르려고 그 고난에 참여합니다. 이것은 내가 노력하여 부활을 얻어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바울은 자기 율법의 의를 가지고 복음을 핍박하고 방해하는 자의 길로 달려가다가 결국 멸망의 길로 갔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붙잡힌 겁니다. 바울을 붙잡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붙잡힌바 된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붙잡혀서 생명의 길로 가는 것 이 자체가 이미 상입니다. 내가 멸망의 길로 달려가다가 주님께서 붙잡아 돌이켜 주셨다면 생명의 길로 가는 이 걸음 자체가 이미 상과 복입니다.

 

이어지는 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세상의 원리는 경쟁하여 승리하는 자가 독점하는 겁니다. 승자독식주의가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렇게 하여 얻는 결과물들이 멸망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라는 탐심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의 말이 아니라 교회로 모인 곳에도 목회성공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얼마든지 세상의 방식을 도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로 받는 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7~8절입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의의 면류관은 바울 자신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재림을 사모하기 마련입니다. 재림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아직 땅의 생각에 사로잡힌 겁니다. 그러므로 의의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도 의가 되신 예수님을 받는 것이 성도의 상입니다.

 

야고보서 1:12절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유혹은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시험 곧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린 겁니다. 피조물주제에 하나님처럼 되려고 유혹에 넘어간 인간입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이러한 시험에서 이기신 분은 유일하게 예수님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유혹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 승리의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을 아버지께로부터 옵니다. 그가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낳아진 자들이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베드로전서 5:1-4절입니다.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부탁하는 내용에서 영광의 면류관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도 은혜로 받은 겁니다.

 

본문 9~11절입니다. “봉독 보좌에 계신 이가 다시 오신다는 선포 후에 네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시고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립니다. 그러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경배하며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립니다. 이십사 장로란 구약의 신약의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쓴 관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면류관은 나의 공로로 받은 것이 아니기에 보좌 앞에 면류관을 돌려드리는 겁니다. 이러한 생명과 의와 영광이 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전부가 된 자들이 있는 곳이기에 세상과 같은 차등이나 차별이 결코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11절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만물이 주의 뜻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여도 그것도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자기를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겁니다(11:36). 그러므로 우리 주님 나타나시는 그 날에 이 내용이 온 우주만물에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믿는 자는 찬양할 것이지만 믿지 않고 자기가 만물의 주인인양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경악할 날이 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이를 맞이하시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살해한 자가 자기임을 알고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