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5:8~10 새 노래 2020. 10. 11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지난주에 본 내용은 보좌에 계신 이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책을 받아서 그 인을 뗄 자가 하늘 위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도 없음을 보고 요한이 울었습니다. 그때에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기에 그가 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합니다.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영이 있다고 합니다. 4장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묘사하고 5장은 죽임당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두 곳에서 일곱 영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 죽임 당한 어린 양이 보좌 앞에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책을 취함까지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죽임 당한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 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성취하심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이 두루마리를 취하신 겁니까?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이 계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전 시점으로 이끌리어가서 십자가로 무엇이 다 이루어지는지를 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그 삼일간의 일은 아무도 볼 수가 없었기에 계시로만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에 그 육체는 죽임을 당하지만 그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도 그 영은 일하십니다. 사도요한 만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신 일을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3:18~19절입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의인으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도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그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도 묵시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지만(2:6) 역사적으로는 아직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이 일을 이루시려고 육체로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성도는 구원이지만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에게는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 그 영으로 하신 일이 구약의 성도를 먼저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고 그렇지 않는 자들 곧 옥의 영들에게는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옥의 영들이란 노아 때에 방주를 타지 않은 자들을 말하지만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모든 자들로 봐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와 사망을 이기신 자리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죽임 당한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과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십사 장로는 성도들의 대표라기보다는 기도를 받아 올리는 천사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금 대접 안에는 향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구약 성전에서 향을 피우는데 이 향이 여기서는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다음에 다시 이 기도에 대하여 보겠습니다만 이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요한계시록 6:9~11절입니다.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여기서 죽임당한 영혼들이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인 메시아를 믿고 기다린 자들입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고 순교를 한 자들도 있지만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린 모든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아직 잠시 동안 쉬라고 합니다.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시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대 환난 시기에 순교를 해야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이나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자기의 뜻이 부인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로 죽임 당한 것이란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려면 나의 머리는 잘려야 합니다. 나의 가치관과 판단이 삭제당하고 예수님이 머리가 된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의 기도의 성취가 십자가로 이루어진 겁니다. 나중에 이 본문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본문 9~10절을 봅니다. 봉독새 노래의 내용입니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이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으며 그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피로 사신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가 되고 제사장이 되어 땅 위에서 다스리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새 노래가 어떻게 예언되어 있고 어떻게 성취되는지 봅니다.

 

새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대단한 국면전환이 일어났을 때에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주로 시편에서 새 노래가 나옵니다(시편 33:3, 40:3, 96:1, 98:1, 144:9, 149:1). 시편은 수요일 저녁에 보고 있기에 그때에 자세히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언급한 시편 여섯 편의 내용들은 여호와의 일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며 공의로운 심판과 구원을 이루심에 대하여 새 노래로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는 하나님의 일을 찬양합니다.

 

이사야 42:9~10절입니다. “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10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1~8절을 보면 메시아의 예언입니다. 그런 메시아의 일을 새 노래로 노래합니다, 이사야서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이 여호와의 구원을 받아 나올 것이기에 새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이사야 43:14~20절입니다.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3)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신다고 합니다. 그 새 일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내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지 70년 만에 돌아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에스겔과 다니엘 선지자는 새 일을 예언하였습니다. 그 새 일이 일어날 때가 로마시대임을 다니엘에게 거대한 신상의 환상을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바벨론, 메데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을 보여주며 로마시대 때에 사람의 손의 의하지 않은 뜨인 돌이 그 신상의 발을 부수니 거대한 신상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그 뜨인 돌이 태산을 이루는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겁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면서 찬송하듯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아 나오는 일이 새 일입니다.

 

예레미야 31:21~22절입니다. “21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의하여 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목격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올 것을 예언하면서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반역한 딸이라고 부릅니다. 반역하였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방황하겠지만 여호와께서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신다고 합니다.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시는 일이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는 겁니다. 이것을 신천지나 이단들은 이단의 교주들을 여러 사람들이 둘러싸는 일로 해석하기에 여러 가지 스캔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사야 4:1절입니다.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하여 우리가 수치를 면하게 하라 하리라이사야 3장을 보면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사치를 하고 음행을 함으로 망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서 많이 죽게 됩니다. 남자가 귀하니 일곱 여인이 한 남자에게 자기들이 의식주를 책임질 테니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하여 수치를 면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혼인하여 자녀를 낳지 못하면 큰 수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31:22절에서 여호와께서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시는데 그 일은 여자가 남자를 둘러싼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에 번역은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모 자식으로도 말하지만 남편과 아내로도 말합니다. 목자와 양으로도, 포도나무와 가지로도 비유합니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여인이 또는 남편을 잃은 여인이 다시 남자를 안게 되는 것을 구원으로 설명하고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31~33절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십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손을 잡아 이끌어 내셨지만 그들의 마음이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사람의 마음에 기록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백성들은 새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이러한 새 언약을 십자가로 이루시지만 그 십자가 전에 구약의 성취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주여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온도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의 역할입니다(2:28~3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곧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누가복음 22:20절입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속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습니다. 신분이나 피부색의 차이가 없습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인하여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 내십니다(벧전1:2). 그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고후5:17).

 

오늘 본문 9~10절입니다. “봉독 새 노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죽임 당한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다고 합니다. 그 두루마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인봉을 떼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겉으로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모습이지만 그 죽으심으로 심판과 구원을 이루어내십니다.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렇게 피로 산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은 군림하는 군주가 아니라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절입니다.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십사만 사천 명이 새 노래를 부릅니다. 새 노래는 어린 양의 피로 산 자들만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십자가의 피 뿌림을 입어 흰옷을 입은 구약의 성도들이기에 십사만 사천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큰 무리입니다(7:14). 그러므로 당연히 신약의 성도들도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기에 새 노래를 지금 여기서부터 부릅니다.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5: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