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마태복음 11:28~30 쉼이 있습니까?    2016. 1. 24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쉬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쉼이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면 마음의 쉼을 얻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마음에 쉼이 있습니까? 아니면 도리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고 또 모태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 마음의 쉼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멍에는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당시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알아야 되지만 그 전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다 자기의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한 짐씩 다 지고 갑니다. 흔히 고통 총량일정의 법칙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일평생동안 한 인생의 고통을 계산하여 보면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왜 맞는 말인지 성경의 근거를 될 수가 있겠습니까? 시편 90편을 보시면 인생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일평생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분노 중에 지나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어떤 짐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지고 가는 그런 수고와 슬픔이 아니라 율법이라는 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곧 토라를 어께 위에 짊어진다는 표현을 합니다. 소가 멍에를 지듯이 율법이라는 멍에를 지기 시작하는 나이는 13세부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의 게마트리아에 의하면 13이라는 숫자는 하나라는 단어인 에하드의 숫자 값과 일치합니다. ‘에하드라는 히브리어 자음의 단어 값을 합하면 13이 됩니다. 이 생각에 근거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나이를 13세로 보고 성인식을 치릅니다. 이때부터 율법의 아들이 됩니다. 이 성인식을 마칠 때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내 어께 위에 짊어지고 세상을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율법을 짊어지게 된 사람은 죽어도 벗을 수가 잇는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죽어도 율법의 영향을 받는데 그 이유는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들의 개념에 흙은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신체 가운데 이 부정한 부분이 모두 없어질 때 까지 율법의 영향을 받으며 사람의 살이 모두 다 썩어서 없어진 뒤에야 율법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쉬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시신을 동굴의 무덤에 세마포로 사서 돌 위에 놓아둡니다. 그리하여 살이 다 썩어지면 그 뼈를 동굴의 무덤 한곳에 넣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가 조상들에게도 돌아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 조상들의 뼈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멍에를 집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의 멍에는 자랑스럽게 집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앞에서 본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원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왜곡되게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그 어떤 권위와 권세보다 더 큰 권세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은 율법 해석의 전통과 권위를 그들의 율법 선생에게 두고 있습니다. 그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모세가 최종 권위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를 지으신 분이시고 율법을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대하여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도 짐이지만 모든 인생들이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다는 것을 시편 90편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좀 더 근원적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한 곳을 더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3:16~19절입니다.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부터 인생은 수고하여야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금지한 선악과를 뱀의 유혹으로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이런 수고가 없었습니다. 타락이란 하나님 절대의존적인 피조물의 자리를 이탈한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 타락한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금요일에 이 설교를 생각하면서 저의 집사람에게 당신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집사람이 하는 말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데 그 다 이루심을 믿지 못하니 그것이 무거운 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 아내라서 한 답인지 본인의 답인지 그 마음을 다 알지 못하지만 우리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결단과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우리에게 어렵고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인생의 짐을 더 봅시다.

 

창세기 5:28~32절입니다.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타락한 인생들이 천년을 가까지 살았지만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얼마나 수고로운지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해서 라멕이 아들을 낳고서는 노아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노아의 이름이 안위 곧 안식과 쉼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쉼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17년 전에 창세기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에 노아 홍수에 대한 이야기를 족보를 따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말씀드리지 않았던 내용인데 아담이 몇 대 손까지 함께 살았겠습니까? 나이를 계산해보면 아담이 셋을 낳은 나이가 130세입니다. 이 나이를 따라 계산하면 노아 4세 때 까지 아담이 함께 살았습니다. 노아는 어리지만 아담으로부터 직접 에덴동산의 이야기와 타락과 추방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므두셀라가 죽으면 세상의 심판이 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유다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는 낳고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다가 하늘로 데려감을 당합니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 라멕이 노아를 낳으면서 하나님께서 안식 주시기를 원한 것입니다. 므두셀라 나이를 계산해 보니 노아 600세 되던 해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창세기의 족보를 이렇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첫 아이를 낳은 나이를 보면 노아 앞에서 가장 늦게 첫 아들을 낳은 자는 므두셀라이고 그 다음이 라멕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백세 이전에도 아이를 낳았는데 왜 므두셀라와 라멕이 늦었을까요? 에녹이 늘 하나님의 심판을 전함으로 이들의 결혼이 늦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500세가 되던 해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늦은 나이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라멕이고 그 할아버지는 므두셀라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에녹입니다. 노아는 에녹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에녹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으로 므두셀라나 라멕은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노아는 오백세가 되어서 아이를 낳은 것으로 봅니다. 결혼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7~39절입니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노아의 때에 사람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안식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수고롭게 일하고 살지만 그 수고를 자기들의 힘으로 들어보기 위하여 어떻게 하든지 돈을 많이 벌어서 넉넉하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 인생의 목표를 삼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참된 안식은 없습니다.

 

노아 홍수를 통하여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모두가 수고롭게 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고롭게 일하는 가운데서 셋의 계열에서 이 수고를 끝내어 주실 하나님의 안식을 기대하면서 노아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를 통하여 무엇이 안식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고팔고 먹고 마시며 시집가며 장가가는 일에 모든 것을 다 걸어놓고 살아갑니다. 이런 삶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은 이미 타락으로 수고한 인생들이 더욱 수고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오백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무엇이 수고이며 안식인지 보여줍니다. 온 세상이 홍수로 심판을 받을 때에 방주를 타는 것이 안식이듯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안식이 옵니다.

 

이제 다시 본문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짐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이란 왜 사람이 죄인인지를 알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유치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종의 역할이 율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가르친다는 선생들이 율법의 의도를 모르고 율법 자체의 조문에 매여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법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얽어맨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저주받게 하고 죽이는 일인데도 오히려 그런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길이 의의 길인 줄 알고 그렇게 지킨 것입니다. 물론 율법이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율법의 지켜 의에 이를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예수님은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쉬게 하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쉬게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가도 멍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멍에가 쉽고 짐이 가벼운 이유는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구약적인 배경이 있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멍에라는 것이 율법의 의무만이 아닙니다. 왕들의 학대와 이방인들의 압제를 멍에라고 표현합니다(왕상12:11, 9:4).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이런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의 멍에를 또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멍에는 쉼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쉼을 주시는 멍에가 무엇입니까?

 

스가랴 9:9~10절입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예수님께서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오시는데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귀 새끼를 타신 분이 모든 전쟁의 무기를 끊어버리고 땅 끝까지 화평을 전한다고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십니까?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 쫓으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곳인데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이 사건으로 율법을 지킨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며 역설입니다. 어떻게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방주를 예비하듯이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노아가 물로 심판을 받는 가운데서 물에서 구원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안과 밖으로 구원과 심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배우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쉽고 가벼운 짐이며 왜 그 멍에 아래서 마음의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법도 죽은 자에게는 더 이상 어떤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와 사망을 낳게 됩니다. 물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면 생명을 얻습니다만 모든 인간은 이미 타락한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가운데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그 어떤 누구도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십니다. 그 다 이루심으로 인하여 그 영을 넘겨주시면 죄와 사망의 법에 갇힌 자들이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방되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8: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아래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으로는 연약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내십니까?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육신에 죄를 정하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신 것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율법을 어기면 저주를 받고 사망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영을 따르는 자 곧 자신의 행위로 율법의 의를 추구하지 않는 자가 영을 따르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마음의 쉼을 얻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갈라디아서 3:10~14절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 백성들이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신 저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묶이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다윗의 복도 동일한 복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믿으십니까? 이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에게 주시는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임한 자들은 참으로 마음의 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율법적인 금욕의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제 나는 죽었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내가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기에 우리의 짐이 가볍고 쉬운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절을 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 금욕적인 일로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면서 조금 헌신하는 것을 십자가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세상에도 알려져서 누가 혼자 죄를 뒤집어쓰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문맥을 따라 함께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 앞의 말씀을 봐야 합니다.

 

마태복음 16:21~23절입니다.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에 베드로가 말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생각이며 사람의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 보겠다고 나서는 이 생각, 이 행위를 죽이라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다는 것은 자기 주체성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나의 주인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땅의 먼지이며 티끌임을 압니다. 입김보다 가벼워서 저울에 달 것도 없는 자들입니다. 수에 칠 가치도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는 것이 믿음이며 이런 믿음은 선물이기에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그 마음에 쉼을 얻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7~11절입니다.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바리새인들이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가 하는 말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도 메지 못한 멍에가 율법의 멍에라고 합니다. 이제는 그런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쉼을 얻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이 주 예수의 은혜는 설교시작 오 분 안에 끝내 버리고 그 후부터 결론까지 인간들의 충성 경쟁으로 이 세상의 복과 세상의 영광과 영향력을 말하고 나아가 천국의 상급을 더 많이 받게 하겠다는 이야기들이 과연 쉼을 주는 말씀입니까? 이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참 쉴 곳을 찾으시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