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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15~21 심판하여 이길 때 까지 2016. 2. 14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1)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본문을 읽으면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이 내용입니다. 왜 이 말씀이 잘 보입니까?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대표기도 할 때에 이 말씀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즈음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하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는 우리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꺾어 버리지도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를 꺼지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과연 그런 뜻으로만 이 말씀이 인용이 되었을까요?

 

지난주에 본 말씀은 계속된 안식일 논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림자로서의 안식일을 지키느라고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그 양을 건져내는 자들이 안식일에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를 안식하게 하시는 일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면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그 안식 주시는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이 안식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런 안식이 싫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값없이 받는 안식이라면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키는 자신들과의 차별성이 없어지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합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십니다. 무엇을 아신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아시고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아셨다면 자신들의 제자들과 힘을 합하여 그들을 물리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논리적으로 패배하였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안식일 지킴이 틀린 것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안식이 진리입니다. 참된 안식을 예수님이 친히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안식을 얻으면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배후의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2주 전에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미혹하는 용, 곧 옛 뱀 마귀 사탄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대적 자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쫓겨난 신세가 된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볼모로 잡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후의 세력을 예수님은 이미 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과 직접적인 충돌을 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 자리를 피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렇게 따르는 자들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예수님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입니다. 지금 메시아의 하실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자신을 알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흔히 메시아 은닉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면 이런 일들을 이루는 메시아로 추종하기 때문에 자심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어났을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병을 고쳐주고 양식을 해결해주는 이런 메시아를 백성들이 원한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의 메시아 왕국을 꿈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메시아가 이렇게 일하게 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사야 42:1~4절입니다.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오늘 본문이 이사야서 말씀의 인용입니다만 단어들이 조금 다르게 사용됩니다. 이사야서는 정의를 마태복음은 심판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시행하시는 것이 심판이기에 그렇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고 합니다. 섬들이 어떻게 교훈을 앙망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섬들이란 멀리 떨어진 나라들 곧 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여호와의 종이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데 왜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빌립보서 2장을 보시면 하나님과 동등 되시나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 사역에서 나보다 크신 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2장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사역을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시는데 그 첫 번째 증거로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는 자를 택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오직 예수님에게만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변화 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동일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때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났지만 모세와 엘리야를 향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한 자 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그 종 곧 메시아가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주어 이방에 정의를 베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이스라엘에 정의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왜 이방에 정의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정의란 개역한글에서는 공의로 번역되었습니다. 저는 정의보다 공의가 더 좋은 표현으로 봅니다. 어떻든 공의나 정의를 베푸는 것이 심판인데 왜 이스라엘에 심판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에 심판을 베푸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이미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 자체가 이미 이스라엘에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이 일어날 줄 생각하였지만 오히려 그 날이 심판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42:2절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종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데 아주 조용하게 이루어내신다고 합니다. 들렌다는 말은 어수선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들레지 않으시고 조용하게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논쟁을 하는 자들에게 안식일의 의미를 말씀하시고서는 그들에게서 떠나가십니다. 그리고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메시아가 오셨다면 큰 소리로 외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외치지 않고 들레지 않음으로 거리에서 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게 일하신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일하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상태가 이미 상한 갈대이며 꺼져가는 등불과 같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고치려면 갈대를 베어내어야 하고 등불을 끄고 심지를 돋우고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상한 갈대를 그대로 두면 더욱 상하여질 뿐입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그대로두면 꺼져버립니다. 꺼져가는 심지의 각주 1)을 보면 연기 나는 삼대로 되어 있습니다. 상한 갈대와 연기 나는 삼대를 고쳐내시려면 조용하게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대로 두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본문에서는 정의를 시행하여 그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기까지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심판하여 이길 때 까지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입니다.

 

여기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을 이 당시의 로마의 세력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볼 수 있는가 하면 이사야 36:6절에서 애굽을 상한 갈대지팡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남 유다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하면서 산헤립 왕이 그 군대장관 랍사게를 통하여 한 말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의지하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도 소용없다고 함으로 그들의 군대가 전멸을 당합니다만 이스라엘이 애굽의 힘을 의지하려고 한 것에 대하여 애굽이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한 것은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애굽을 의지함으로 오히려 애굽이 상한 갈대이기에 꺾어지면 손이 찔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등불로 된 각주에서 연기 나는 삼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연기 나는 삼대는 이사야 7:4절에 보면 북 이스라엘의 왕과 아람 왕이 연합하여 남 유다 아하스 왕을 공격한 것입니다. 아하스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 왕에게 말하기를 두 왕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하스는 선지자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표적을 구하라고 하여도 자신은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여 줄 수 있겠느냐는 불신앙으로 표적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표적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등불 곧 연기 나는 막대기는 중첩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 본문에서는 강대국의 세력이 상한 갈대와 같고 연기 나는 막대기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로 벌벌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 말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과 같습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와서 강대국을 물리치고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내어야 메시아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군대를 조직하지고 않습니다. 군자금을 모으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메시아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고 조용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시편 19:1~4절입니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1)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이 말씀을 읽은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하여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하게 일하시는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날이 날에게 전하고 밤이 밤에게 전하는데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여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일하심도 이와 같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방인들도 그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조용하게 합니까? 요란하게 합니까? 교회당을 가보면 교회당 앞과 벽이 현수막으로 가득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교회들이 거창한 표어들과 목표들이 교회당 전면에 잘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777, 333 운동과 같은 것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3만 교인, 3천 셀, 3백 사역자 이런 식의 목표를 세워놓습니다.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얼마나 교인들을 독려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교인들끼리 하는 말이 주일날이 죽일 날이 된다고 합니다. 참된 안식을 맛보고 누려야 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교회 일에 지쳐서 허덕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십자가로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들으면 다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운동을 통해서 변혁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일하십니까? 로마를 물리치기 위한 그 어떤 정치적인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두어도 상한 갈대이기에 꺾어지고 썩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이스라엘을 개혁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한 갈대를 베어 버리고 꺼져가는 등불은 불을 끄고 심지의 끝 부분은 자르고 기름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 합니다. 사람도 필요하고 재정도 필요합니다.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사회변혁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운동을 하시지 않습니다. 조용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상을 뒤집어 엎으셨지만 그것도 자신이 성전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언제까지 이렇게 일하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42:4절입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오늘 본문 마태복음 12:20~21절입니다.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1)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크게 소리치지 않으시고 들레지도 않으시면서 조용히 일하십니다. 그렇게 일하시는데 쇠하지도 않으시고 낙담하지도 않으십니다.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까지 그렇게 일하심으로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게 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 까지 하십니다. 그러면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게 됩니다.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는 것은 심판하여 이기셔야 합니다.

 

심판하여 이기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심판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승리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하실 그리스도이신데 자신이 심판을 받으시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승리가 됩니다. 이 승리로 인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용서를 베푸시고 생명을 주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며 심판과 용서와 승리가 그 안에 다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면 다 아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의 통과 의례가 아닙니다. 십자가로 시작하여 십자가로 완성되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시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이사야 42:5~9절을 봅니다.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까지 본 여호와의 종과 연결되는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의로 부르신 이 분을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그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심판하여 이기는 자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심판하여 이기시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언약이 되시며 동시에 이방의 빛이 되십니다. 이러한 메시아가 하시는 일이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이 일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에게 주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성취는 반복심화 되고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통하여 계속하여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구약에서 새 언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새 언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세우는 언약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말씀하여 두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아들을 통하여서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0~32절입니다.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최후의 만찬에서 가룟 유다가 떡을 받고 나갑니다. 이 일을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하여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도 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영광입니까? 제자에게 배신당하여 십자가에 죽는 일이 무슨 영광입니까? 그런데 이 일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기에 아들에게도 영광을 주시는데 곧 주신다고 합니다. 그 영광이 바로 십자가의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알 수도 없는 그 십자가로 예수님은 지금 묵묵히 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심판하여 이기실 때 까지 가신 길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받으시는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여 이기실 때 까지 조용하게 그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 이제 그 완성된 의의 선물을 자기 백성들에게 넘겨주십니다.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합니다. 그 십자가는 심판과 승리를 함께 담아냅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자는 심판을 거쳐 용서를 받은 자들이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 밖에는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심판하여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무엇을 전하였는지를 사도행전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4:16~17절입니다.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복음 전할 때에 발을 쓰지 못하는 자는 고쳐줍니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려고 하는 것을 말리면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을 가게 방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비를 주시고 결실하게 하시는 선한 일을 하심으로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심고 거두어 먹고 사는 이런 기쁨도 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방임하였다는 말씀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는 말씀의 함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 지나간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방임하시고 간과하셨다고 합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명하사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정하신 사람으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증거가 심판하여 이기실 때 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제 심판하여 이기신 십자가의 사건이 확증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심판이 확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그 심판 당하심으로 용서를 받는 자리이지만 십자가 밖은 여전히 심판 안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이 역사 끝까지 밀고 가십니다. 땅 끝까지 이 복음이 증거 되면 그제야 이 역사의 끝이 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미 심판하여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흉흉함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게 됩니다.

 

골로새서 3: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이미 심판하여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그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이미 심판하여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