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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53~58 예수를 배척한지라 2016. 5. 15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 3)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53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곳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러나 자라나신 곳이 나사렛이기에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회당에서 정기적으로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의 회당은 유대 성인 남자라면 누구든지 회당장이 지목하면 앞에 나와서 성경을 읽을 수 있고 그 내용에 대하여 잠시 언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다른 지역에서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을 일으킨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 회당에 가신 예수님께 회당장이 나와서 성경을 읽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경을 읽고 잠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54~5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읽으시고 말씀을 잠시 전하셨는데 그들이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전하심이 어떤 회당장이나 서기관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고 합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이며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합니다. 이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이 어려서부터 알아온 그 예수가 이런 지혜와 능력이 나오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57절에서 예수를 배척한지라 앞에 각주가 있습니다. 각주를 보면 예수로 말미암아 넘어진지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서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이들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평소에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특이한 사항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 내용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단 한 번의 사건은 누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41~52절입니다. “봉독 요셉과 마리아가 12살 된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유대인 남자는 12살이 되면 율법의 아들이라고 하여 율법적 의무를 져야 합니다. 절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오는데 하룻길을 갔는데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성전까지 가니 그곳에서 율법선생들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걱정하여 너를 찾았다고 하니 예수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부모는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마리아는 이 말을 마음에 담아두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나사렛에 내려가서 부모를 순종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외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전에 어떤 특별함의 기록이 없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봐도 별 특이한 사항 없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전국을 다니시면서 기적을 행한다고 하고 말씀을 전한다고 하니 의아해 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친족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데리러 오기도 하였습니다(3:21). 가족과 친족이 이 정도였으니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지혜로운 말과 그 능력들을 보고서도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얼마나 사람들과 같이 되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단한 율법학자의 제자로 공부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가문의 출신도 아닙니다. 그저 목수 요셉의 아들로 그렇게 자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족을 봉양하면서 목수의 일이나 하고 살아가는 것이 평범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적을 행하다고 하고 천국 복음을 전한다고 나서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57~58절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믿지 않았기에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 말씀을 가지고 치유 사역을 한다는 사람들이 믿으면 능력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능력을 행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은혜의 선물입니다. 믿어주는 나의 결단이나 행위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주신 믿음으로만 믿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사람들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배척을 받았습니다. 물론 표적과 기적을 보고 따르는 자들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런 표적과 기적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할 때에 모두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우리가 상상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 그 자체를 증거 하면 우리도 배척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4:16~22절입니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1)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오늘 본문과 평행구절입니다. 17절을 보시면 회당장이 예수님께 성경을 드린 것입니다. 그 성경이 이사야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61장의 내용을 찾아서 읽으시고 책을 덮어 회당 장에게 주고 나서 앉으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합니다. 고향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주목하여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으시고 이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고 있는 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 은혜로운 말로 놀랍게 여기기는 하였지만 이 사람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며 믿지를 못하는 것이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과 같은 모습입니다.

 

23~30절입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지만 믿지를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고 오신 메시아임을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은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사렛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 때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이방인 지역인 시돈의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씀과 엘리사 시대 때에 이스라엘에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이방인 수리아 사람 나아만 한 사람만 깨끗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 너희들은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 때 그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은 자들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가 돌보심을 입지 못한다는 이 말씀에 나사렛 사람들이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결국은 나사렛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는 이스라엘 그것도 성전이 있다는 예루살렘에서 배척 당합니다.

 

요한복음 1:9~11절입니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3)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합니다. 자기 땅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땅이라는 말은 자기 소유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무수한 나라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자신의 소유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기 땅, 자기 소유된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접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 어떤 누구도 인간의 힘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을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12~14절입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아무도 영접할 수가 없는데 영접하는 자가 나오는 것은 사람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다 해도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명심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자체를 왜곡되게 전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며 지혜를 추구하는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이나 지혜를 구하는 이방인들의 눈으로 십자가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표적도 아니고 지혜도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으로도 이방인의 사고방식으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보암직하게 포장하여 전한다면 그런 십자가는 부적을 파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로마서 9:30~33절입니다.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나사렛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전체가 다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믿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30절에 이방인들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믿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취급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들과 이방인들이 어떻게 의를 얻게 됩니까?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믿음에서 난 의와 대비되는 말이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따라간 자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으로 부딪칠 돌에 부딪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과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4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왜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때에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도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때처럼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예수님 자신이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들을 예수님이 단지 고향 사람이라서 믿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상상하고 있는 메시아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육신적으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걸려 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기록한 이 바울도 예수님 때문에 걸려 넘어진 자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던 자였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한 자의 모습이며 이것이 육신의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5:14~17절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대신한 죽음입니다. 그가 대신 죽으심으로 그의 죽음이 나누어진 자들은 살아난 자들입니다. 이렇게 살아난 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부터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전후로 완전히 시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전에는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옛날 육신의 방식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니 예수님도 죽어 마땅한 자로 보았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전히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환영할만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배척하고 싶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걸려 넘어질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천국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전하고 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도들도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선행이나 사람의 공로나 사람의 가치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언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도 복음을 전할 때에 정말 걸려 넘어질 만한 모습으로 전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13~15절입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바울사도가 육체의 연약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시험하는 것이 바울의 육체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사단의 가시라고 합니다. 이것을 빼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하였지만 하나님은 네가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주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십니다. 바울은 더 이상 간구하지 못하고 그 사단의 가시를 평생 안고 살아갑니다. 이 육신의 약함이 얼마나 심한지 바울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시험에 들 만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저 꼴이냐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바울을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너희의 복이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바울을 위하여 눈이라도 빼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른 복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책망을 합니다.

 

이어지는 16~20절입니다. “16 그런즉 2)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이 그렇게 육신의 연약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한 복음을 받고 바울을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접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눈이라도 빼 줄 수 있었다면 주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고나니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 온 것입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데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율법의 조문을 지켜야 한다고 나온 자들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에게 언성을 높이는 것은 의혹이 있다고 합니다. 율법주의 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이간질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쉽게 은혜의 복음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은혜의 복음은 육신의 자랑거리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은 육신의 자랑거리를 만들어주기에 십자가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0~11절입니다.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너희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줄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합니다. 다른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은혜의 복음을 떠나 율법주의자들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무너뜨리는 자들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박해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가 걸림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척할 만한 내용, 걸림돌이 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자체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걸려 넘어지겠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곡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말 그대로 죽음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아 죽는 죽음의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버림받음만이 유일하게 버림받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자신을 나누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절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면 배척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걸려 넘어지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보여 지면 됩니다. 여기서 시선이 돌아가면 그것이 벌써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미혹(迷惑)이 무엇입니까? 가장 그럴듯하게 진짜처럼 보이는 것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후에 어떤 사람은 영화 곡성(哭聲)보러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곡성을 보라고 문자도 왔습니다. 그래서 무슨 영화인지 검색을 해보니 포스트에 절대 현혹되지 말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성경구절도 나오고 무당도 나오는 그런 스토리인데 정작 그 감독은 이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예술이라는 것은 시대정신을 고발하는 것이 예술의 특징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무엇에 현혹되고 무엇에 미혹되는지 정신 차리라는 것이 영화감독의 의도임을 영화의 스포일러를 보고 알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미혹되고 현혹되고 있습니까? 바울사도의 이 외침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어리석도다! 늘푸른 교회 교인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 말씀이 또 한 주간을 살아가야하는 우리에게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