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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34~36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2016. 6. 12

 

34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지난주의 말씀은 바다위로 걸어오신 예수님께 베드로가 자신에게도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니 물 위로 잠시 걸었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보고 무서워하자 당장 물에 빠져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건져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마치 물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노아 홍수의 이야기와 홍해를 건넘과 요단강을 건넘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어린 양의 피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도 구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별 어려움이 없으면 만족하다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워 보여도 그것으로는 숨이 가빠서 살 수가 없습니다. 폐로 호흡하는 포유류 동물이 물속에서 살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설교를 들은 어떤 분이 노아 홍수 때에 물고기가 궁금했다고 하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신 모양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물고기를 낚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낚아 올리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이 세상이 물속이라고 생각하니 의미가 더 새로워졌습니다.

 

그 말을 듣자 두 가지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도 바다에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은 생각이 겹쳐지는 것입니다. 좋은 물고기를 담고 못된 물고기를 버리는데 좋은 물고기는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담을 수가 없는 세상의 것과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은 버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예수님의 그물에 걸려서 좋은 물고기로 담겨지려면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털어져 나가야 되겠습니까? 혼동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세력으로 표현되는 바다라는 세상 속에서 내가 살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거짓말이 나오고 나의 유익을 따라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물 밖으로 스스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이 땅으로 오시고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 십자가라는 저주의 자리에 오심으로 자기 백성을 끌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베드로를 끌어올리시듯이 우리를 끌어 올리십니다. 이렇게 모은 자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여놓으시는데 그 곳에는 다시는 바다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1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새 하늘과 새 땅에는 처음의 하늘과 땅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바다는 다시 있지 않다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창조되는 땅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이 거할 영원한 처소인데 이곳에는 더 이상의 혼돈이나 반역이나 교만이나 거역하는 세력이 사라진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의 말씀을 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예수님이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즉시 손으로 끌어올려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잔잔해 졌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에도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임하셔야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풍랑 속에서도 주님처럼 그 배안에서 주무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시는 것이 십자가로 자신을 우리에게로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시기 위한 자리입니다. 우리에게로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다시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이 혼돈의 세상에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시는 그리스도 안에로 옮겨놓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옮겨지는 자를 봅니다.

 

본문 35~36절입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마을마다 사람들을 보내어 병자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의 고향에서는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병든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들은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손을 댈 수 있도록 허락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생략되어 있지만 이 간구를 주님께서 들어주셨기에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지 병 고침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9장에서 본 내용을 다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9:20~22절입니다.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이 말씀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한 관리로 되어 있는 회당장의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을 청하여 가는 중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겉 옷 가를 만집니다. 이 여인은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관리는 예수님을 직접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그 딸을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렇게 고쳐달라고 말도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병행구절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함께 보면 이 여인은 여러 의사에게 갔지만 고침을 받기는커녕 괴로움만 당하였습니다. 당연히 재산도 더 허비하였고 병만 더 깊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자기 집에 오셔서 손을 얹어 기도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가는 중에 이 여인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가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에 접촉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를 아시고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은 수많은 사람이 에워싸서 밀고 있는데 누가 그랬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은 것을 알기에 예수님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여 주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그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9장에서는 그 여인만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청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을 하려면 적어도 식사라도 대접을 해야 하는데 그럴 형편도 되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정말 가난한 심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예수님 앞에 나가지도 못하고 혈루증으로 12년을 앓고 병이 더욱 깊어졌는데 예수님의 그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마음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 어떤 행위로도 주님 앞에 나갈 수가 없기에 오직 믿음으로만 나가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때 옷자락이 무엇인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기억하기 위하여 남자들의 겉 옷 네 귀퉁이에 옷 술을 다는 것입니다. 그 술의 이름을 히브리어의 숫자로 풀어내면 600이 나오고 그 매듭을 꼬아서 계산을 하면 85가 되기에 그 옷 술은 율법의 하라 하지 말라는 613가지를 기억하게 하는 장치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 옷 술을 붙이고 다니는 것은 율법을 기억하고 율법을 지킨다는 표시가 됩니다. 이런 옷 술을 유대의 랍비 문헌에서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경건하고 온전한 사람들의 옷 술을 만지면 온전하지 못한 자가 온전하여 진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예수님의 그 옷 술을 만짐으로 자신이 낫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만져도 마태복음 9장에서는 한 여인만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6절은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기계적인 것이 아닙니다. 손에 대는 자의 자세가 먼저 나옵니다.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에 대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12해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과 같은 심정인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면 좋겠다는 간구도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다만 그 믿음으로 옷자락을 만진 것입니다. 그런데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생략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손을 댄 자는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는 이 옷 술에 대하여 좀 더 구약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36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그들은 예수께, 그 옷 술 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그 옷 술 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옷 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옷 술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옷 술 곧 율법을 기억하기 위하여 메어두는 그 옷 술을 만짐으로 병이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앞에서 본 대로 유대 랍비들이 자신들이 율법 지킨다는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그 옷 술을 만지면 완전하지 않은 자가 완전해 진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아무도 율법으로 완전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12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그 여인처럼 재산만 허비하고 몸만 더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옷 술을 만짐으로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민수기 15:37~41절입니다. “3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신명기 22:12절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술을 보면서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려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하려고 옷 술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옷 술을 달고 여호와의 계명을 기억하고 순종하게 하시는 그 최종 목적이 41절입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옷 술을 보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애굽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아 나온 출애굽의 백성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의 말씀을 어떻게 생활에 적용하면서 살았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마태복음 23:4~5절입니다.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면서 자기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신들은 평소에 율법을 지켜서 온전한 자들이기에 자신들의 옷 술이나 만지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온전하여 진다는 말이 랍비들의 문헌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옷 술을 크게 만들어 스스로 자신들이 경건하다고 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주의자들로 인하여 정작 쉼을 얻어야 하는 하나님의 가난한 백성들은 쉼을 얻지 못하고 날마다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지고 허덕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온 그들을 예수님께서 영접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도 서기관도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겉 옷 가에 옷 술이 있었던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멋있는 옷 술이 아닙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런 옷 술이라도 만지게 하여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겉옷의 술을 만지는 자는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율법주의로서는 결코 구원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율법을 기억하게 하여 방종하게 하지 않게 하려고 옷에 술을 달라고 민수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 옷 술을 보면서 하나님의 언약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어린 양의 피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옷 술을 만들어 붙이라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15:39절을 다시 봅니다.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이 술을 보고 말씀을 기억하여 방종하지 않고 자신이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려고 하신 이 옷 술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 옷 술을 길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방종 하는 것이며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을 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자유를 준다고 하니 그 자유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종하고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고 있는 자들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자기의 짐을 질 뿐 아니라 연약한 형제의 짐까지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인데도 자신은 자유라고 하면서 율법주의로 살 때보다 더한 방종을 하면서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음행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붙잡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가 되고 배척당하시는 그 초라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마음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리새인들이 옷 술을 길게 하면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을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고 생색을 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신은 그들의 욕망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도 십자가의 원수로 달려갈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을 하는데 세상의 영광을 주는 십자가, 나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십자가.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십자가라면 그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옷 술을 붙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을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의 이력과 경력들을 과시하지만 그 허전한 속을 채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됩니다. 어떤 심정으로 기다리겠습니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그 여인처럼, 오늘 본문의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그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기를 간구하는 그 심령으로 주님을 붙드는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날까지 날마다 주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기를 소원하는 그 가난한 심령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