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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21~35 용서의 나라 2016. 10. 16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본문 21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으면서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왜 이 질문을 했을까요? 마태복음 18장의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한 것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마태복음의 18장의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어떻게 영접하여야 하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린 아이, 나를 믿는 작은 자, 잃은 양, 권면의 기회를 세 번이나 주었는데도 말을 안 들으면 세리와 이방인 같이 여기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 내치라는 의미보다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이방인을 긍휼히 여긴 것처럼 긍휼을 베풀라는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메고 푼다는 것도 결국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서로 용서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형제가 범죄 할 때에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22절입니다. 베드로가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느냐는 질문은 자신은 형제에 대하여 일곱 번을 용서할 수 있겠다는 자신의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일곱 번의 용서는 대단한 각오입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라고 하십니다. 문자대로 하면 490번입니다. 같은 잘못을 490번 해도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의미하기에 완전한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일곱 번이란 말 그대로 일곱의 숫자를 말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 번의 권면을 거부하면 세리와 이방인처럼 여기라는 말씀을 들었기에 세 번 보다 일곱 번이 얼마나 더 많은 용서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란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3~35절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서는 천국의 비유를 말씀합니다. 천국은 종들과 결산하는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종이 일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갚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이 네 몸과 아내와 자식들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팔아도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 만 달란트입니다. 그래서 종이 임금에게 엎드려 절하며 참아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 갚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임을 임금이 알기에 불쌍히 여겨서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신나는 날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탕감 받은 자가 집으로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바로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참아주면 갚겠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그 사람을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런 행태를 본 자들이 딱하게 여겨 임금에게 가서 이 사람의 행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그 사람을 다시 잡아오게 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면서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천국비유이신데 이 말씀의 결론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두 가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속죄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의 속죄일은 유대력으로 710일입니다. 속죄일이 되기 전 40일간을 용서하는 기간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이 속죄일을 지키기 위한 장로들의 유전으로 보입니다. 40일 중에 30일은 사람들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기간입니다. 나머지 10일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여야 대 속죄일을 심판을 받지 않고 용서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순서도 사람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고 나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순서로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보면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주어야 하나님께서 우리도 용서하여 주신다는 조건처럼 보입니다. 만약 문자대로 한다면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신다면 아무도 이 조건에 해당될 사람은 없습니다. 이 말씀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인간의 조건으로 말하면 단 한명도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천국 비유는 먼저 용서 받은 자가 얼마나 엄청난 용서를 받았는지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달란트와 데나리온에 대한 이해입니다.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면 백 데나리온은 백일만 일하면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일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입니다. 육천일을 일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일 달란트를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일 년에 3백일을 일한다고 하면 20년을 일하면 겨우 일 달란트 갚을 수 있습니다. 20세부터 60세까지 한 푼도 쓰지 않고 일하면 겨우 두 달란트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먹고 살아야하기에 평생을 일해도 두 달란트도 갚지 못합니다.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 해 주지 않았다는 것은 이 사람이 과연 탕감 받은 자가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본문 21절을 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형제가 범죄 하면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는 것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주인이 불쌍히 여김으로 탕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천국이란 우리가 용서 해주는 조건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방적으로 영원토록 용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지금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이며 그런 빚을 용서 받아야 하는데 무엇을 어쭙잖게 일곱 번을 용서해 준다는 말이냐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차재승 교수의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심판과 용서와 의가 함께 드러난다는 내용을 공부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심판이 외면적인 것이라면 그 내면적인 것은 용서라는 것입니다. 교재에서는 십자가에 대하여 심판과 용서와 의를 말하지만 십자가는 그것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며(19:30)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5:6), 우리가 죄인 되어있을 때에(5:8),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을 때에(5:10)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도 용서 받은 후에 그의 서신은 성도는 그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선택된 것이라고 합니다(벧전1:2).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라는 것을 할 때에 얼마나 교묘하고 우리 안에 악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 책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얼마나 용서해야 하는가를 베드로가 질문하자, 예수님은 엉뚱하게도 하나님의 용서의 신비스러운 영원함(일흔 일곱 번, 혹은 일흔 번에 일곱 번)과 무한한 절대적 가치(일만 달란트)에 대하여 알려주셨다(18:21~27). 예수님의 관심은, 인간의 용서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용서마저 그 실행 횟수를 한계 지어 언젠가는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분노를 품으며, 용서마저 참회라는 조건을 달아 주고받는 거래로 추락하며, 용서하는 자가 용서 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도취되어버리며, 용서마저 그 정도의 무게를 저울질 하여 경중을 비교하며, 용서마저 용서 받는 자의 남용과 무관심 속에서 그 가치를 상실해 버리며, 용서마저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기 보다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 받은 자의 영적 도덕적 상태에 따라 그 감격과 깊이가 춤추듯 오르내리는, 그러한 천박한 인간의 용서와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용서를 알려주시는 것이었다.”

 

학자로서 압축된 표현이라서 제가 좀 풀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말에도 삼 세 번 용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잘못을 세 번까지는 용서 해 주지만 더 넘어서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분노를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 번을 용서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번도 용서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용서하였다면 두 번째 같은 잘못을 하여도 그것은 처음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첫 번째 한 것을 완전하게 용서하였다면 기억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싸움을 하면 옛날에 용서하였다는 것도 다 들추어냅니다. 이런 죄인들의 능력으로는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용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용서가 아니라 거래이며, 자신의 용서하는 능력에 도취되는 것이며, 용서의 무게를 저울질 하면서 자신이 더 많이 용서 해 준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박한 인간의 용서와 다른 하나님의 용서가 어떠한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새 언약의 위력입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옛 언약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몸은 끌려 나왔지만 마음이 애굽으로 향하는 것을 옛 언약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은 심판을 행할 수밖에 없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일방적으로 맺으십니다. 이것을 은혜언약이라고 합니다. 왜 인간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받아야 하는지를 모세의 율법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삶도 언약을 배반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도 죄악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데 새 언약의 특징은 용서 하신 그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용서는 자기 자랑을 합니다. 용서 해 준 그 죄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신다면 정말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1:7~10절입니다.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진리와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범죄 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진리 곧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우리가 범죄 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범죄란 세상이 말하는 범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 서게 되면 우리의 전부가 죄 덩어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존재론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우리는 죄 덩어리임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죄와 악함이 어떠한지를 알기에 남의 눈에 티를 볼 틈이 없습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보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죄를 자백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과연 우리 안에 진리의 빛이 비추어 졌습니까? 그 진리의 말씀이 임하였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기에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한 것이 맞습니까? 여러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 한 말씀이라도 우리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우리의 마음의 생각들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신 적이 있습니까? 옛날에 눈물 콧물 한두 번 쏟은 그런 이야기 말고 지금도 선포되는 이 말씀들 앞에서 자신의 실상이 비추어지고 있습니까? 정말 말씀이 우리에게 비추어지고 있다면 회개하게 됩니다.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 그 십자가 앞에서 알게 된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하였다고 용서를 구할 때에 나는 당신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상대방도 십자가 앞에 세워진 자라면 상대방도 그렇게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가 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룬 위력을 이 땅에서 맛보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6:28절입니다.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잔을 주시면서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예수님 자신의 피라고 하십니다. 공동번역으로 이렇습니다. “27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28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죄 사함 곧 죄 용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3:23~26절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그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간과하신 것입니다. 속량과 간과와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다 용서와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2:12~15절입니다.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십자가로 용서가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찾아본 이 말씀들 앞에서라도 우리의 모습이 비추어 지기를 소원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피조 세계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그 창조주를 살해하였습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이제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용서의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우리의 죄가 드러난 적이 있습니까? 옛날 옛적에 한 두 번이 아니라 날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책의 용서에 대한 결론부분의 제목만 언급합니다. 첫째, 용서란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 맺으시는 관계의 내적 본질이다. 둘째, 용서는 십자가의 자기희생적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낸다. 셋째, 용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가 인격적인 관계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넷째,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포괄적으로 회복시키신다. 용서는 이러한 죄의 포괄적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요소다. 다섯째, 용서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지속적이고 종말론적인 관계를 가져온다. 심판은 과거와 현재를 종결짓지만 용서는 앞일을 기대하게 한다.

 

우리가 정말로 이러한 용서를 말씀으로 경험하였습니까? 용서 받았다면 이제 복음과(1:14) 사랑(13:8)에 빚진 자가 됩니다. 이것은 갚아내는 차원이 아닙니다. 용서 받았기에 그것을 갚아내는 것으로 빚졌다고 하면 그것은 결코 복음이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방식은 하나님의 피를 다시 인간의 천박한 거래로 추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용서 받은 사람이라면 그 용서하신 분을 사랑하며 함께 용서 받은 자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에게 범죄 하는 자를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되느냐고 물었을 때에 자신이 얼마나 용서 받아야 하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은 일방적인 용서를 무한히 받아야 하는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위하여 우리가 미리 아심이 되었고 택함을 입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고 또 더 잡아 죽이기 위하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말씀의 빛이 비추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이며 이런 죄인을 용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 받은 자들이 가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용서 하신 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7:36~50절입니다.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4)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는 자신이 용서 받아야 하는 자임을 모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자기들의 의를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의라는 것이 절대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비추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직도 자신이 남보다 의롭다고 여기거나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이 나를 비추어 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병이 들었음을 알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라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인지 밝히 보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살해하였는데 당신은 나를 용서 하여 주셨군요! 이런 자들은 용서 받은 것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서로 만났다면 이들이 할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로 인하여 용서를 말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은혜를 맛보는 곳이 교회여야 하고 그런 교회는 영원한 그 아들의 나라 그 용서가 완성된 나라를 사모하며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