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8~12 높아짐과 낮아짐     2017. 3. 12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지난주에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모세에 자리에 앉은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율법의 선생이라는 말을 듣지만 그 속내는 자기들의 명예를 좋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입에 달고 다니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를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경건의 티를 내기 위하여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 술을 길게 하고 다닙니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화 있을 진저!’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 선생은 하나이며 너희는 다 형제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사회에서 랍비는 아주 존경받는 칭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랍비라는 칭호를 받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매일 토라를 7장씩 7년을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고 통과해서 정식으로 랍비라는 칭호를 받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격이 된 사람은 각 마을의 회당이나 토라 교육기관을 열어 토라를 가르치거나 교육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첫 번째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율법에 대하여 뛰어난 해석을 하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 많을 사람들을 끌어 모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후자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정식으로 랍비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디 출신이냐고, 어디에서 교육 받았느냐고 따집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식으로 랍비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나오는 자들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존경의 호칭으로 랍비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의 선생은 하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랍비와 선생은 둘 다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랍비와 선생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다 형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단체에서는 전부 호칭을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교회에 직분 자들의 호칭을 말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교사와 장로와 집사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자매라고 부르든지 직분을 부르든지 상관은 없습니다만 제가 청년회 시간에 호칭문제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언니, 오빠 그러기에 형제님, 자매님으로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어른들도 직분으로 부르든지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자들 안에는 신분상의 지위나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봉사의 직분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제일 중요하게 보이지만 신분상으로 높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기능상의 직분일 뿐입니다. 몸으로 말하면 입의 역할입니다. 다른 지체는 듣습니다. 그렇다고 입만 있다고 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지백체가 다 필요한 것이 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랍비나 선생이라는 칭함을 제자들에게 받지 말라고 하신 것은 유대 사회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런 존칭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니 그들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 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로 보면 세상의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말로 보입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예수님을 믿으면 지상에서야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는 한 지체입니다. 부활 때에는 현재의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천사와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는 말씀은 랍비, 선생, 지도자와 함께 높은 자리에 있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랍비 중에서도 아주 존경받는 자를 아버지라고 하거나 지도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당에서 신부를 아버지(father)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똑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나온 랍비, 선생, 아버지, 지도자는 전부 높은 자들을 말합니다. 정말로 높으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서로 높으냐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이 세상의 신에게 속고 있는 모습입니다.

 

랍비와 선생과 지도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설교한다고 하는 목사는 필요 없습니까?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자들이며 증인들입니다. 자신이 랍비나 선생이나 지도자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앞에서 성당에서 신부를 아버지라고 하는데 개신교에서도 자신을 영적인 아버지라고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근거로 바울도 자신이 복음으로 낳았다고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아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복음을 전함으로 얻은 아들이라는 말이지 자신이 높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과 자신의 죄인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을 듣는다는 자들도 특정인을 자기들의 선생으로 삼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라고도 합니다. 사람을 지도자라고 따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4: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랍비, 선생, 지도자는 한분 그리스도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누가 알게 하십니까?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목사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는 것이기에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부인되어 지고 오직 우리의 선생과 지도자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스스로 자신들을 높이려고 하는 것을 책망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자들이기에 나를 따르는 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에게 존경과 명예를 받는 그런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로 가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죽기 위하여 가시는데 제자들은 높아지려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랍비, 선생, 아버지, 지도자라는 말을 듣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이러한 칭호들이 다 세상에서 높아진 자들이 받는 칭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며 낮아지려고 하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명예로 여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지고 짐짓 자신을 낮춤으로 나중에 높아지려고 계산하여 행동하는 자는 여전히 높아지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이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과 정 반대로 교육받아 왔고, 우리자신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 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예수님의 말씀과 정 반대로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에게 어떤 친구를 사귀라고 하였습니까? 부자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합니까? 가난한 친구를 사귀기를 좋아하였습니까? 공부 잘하는 아이와 사귀는 것을 좋아하였습니까? 공부 못하는 아이와 사귀를 것을 좋아하였습니까? 친구들은 자기와 코드가 맞는 아이들과 사귑니다. 그래서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부모는 그런 아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는 반발했지만, 우리가 부모가 되니 우리의 자녀가 누구와 사귀면 좋겠습니까? 그 친구와 사귐으로 신분의 상승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언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하면 좋아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와 사귐으로 낮아질 것 같으면 금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높아지려고 하니 이 세상이 경쟁으로 가득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욕망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 힘으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니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라는 곳에서 신의 도움을 받으면 높아진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절이든, 성당이든, 교회든 나를 높여주는 곳이라면 신에게 정성을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겨울에도 목욕재계하고 정한 수 떠놓고 높아지기를 바라면서 빌고 빌었던 우리의 조상들이 교회당에 와서 천지신명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바뀌었지 비는 내용은 꼭 같습니다. 우리 남편, 우리 아들,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회사, 우리나라 높아지게 해 달라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그렇게 열심을 부리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이 땅의 교회라는 곳에서 어떻게 통용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겨서 세상에 높은 자가 되라고 합니다. 세상의 선생이 되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지도자가 되라고 합니다. 모두가 높아지기를 원하지 낮아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이 옳다고 따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이 다 이 세상의 신에 속았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0: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이 말씀의 배경을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탁합니다. 주의 나라에서 자기 두 아들을 주의 좌우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세상의 집권자들은 임의로 백성들을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려고 하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누구든지 크고자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의 섬김을 받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서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도 높아지기 위하여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이 낮아져야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이들의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낮추어 겸손의 티를 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먼저 섬겨주셔야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정말로 높으신 분이 자기를 비워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이 가장 높으신 이름이 되신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높으신 이름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희생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빌립보서 2: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바울사도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다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그의 신앙의 전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5~11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높이지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동등 되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높여주신다고 하시지만 그 높아짐은 이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 영광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육신의 시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역사 속에서 높아지려고 하면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물론 일하다 보니 세상에서 말하는 높아지는 자리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리에서 얼마든지 내려 올수도 있는 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이미 완성된 나라를 받은 자들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때에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사는 곳이 어디입니까? 청와대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들어가면 무엇을 합니까? 탄핵을 받아 쫓겨나야 하는 자리입니다. 탄핵을 당하여 파면이 결정이 되었으면 당장 보따리 사들고 나오면 됩니다. 그런데 못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 집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사저가 있어서 그리고 가면 됩니다만 제가 말씀하는 갈 집이 없다는 것은 아버지의 집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이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보다 더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셨습니다. 저주 받은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갈 집이 있습니다. 그 아들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빨리 가고 싶은 것입니다.

 

하박국서 2:9~13절입니다. “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0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12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3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재앙을 피하려고 높은 데 깃들이려고 다른 사람의 것을, 다른 나라의 것을 탈취한 자들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이든 단체이든 자기가 높아지고 힘을 가져서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이런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간들의 실상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목표를 상향조정을 합니다. 회사든 교회든 자족을 모릅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의 신에 속아서 전부 높아지려고 합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세상은 다툼이 끊어질 날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의 든든한 성읍이라고 하는 것들이 피와 불의로 건설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말씀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명예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나, 이 말씀처럼 이 세상의 재물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나 불탈 것과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는 이 말씀에 해당되는 주의 백성들에게 주님은 어떻게 일하시는 것입니까?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 이루심을 자기 백성들에게 영으로 넘겨주십니다. 그 영 곧 성령이 성도에게 임하게 되면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들어온 것이기에 안식이 있습니다. 쉼이 있습니다. 더 이상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내용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 완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완성된 사랑을 받은 자는 더 이상 이세상의 것으로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현재 내가 사는 것도 감사와 자족함을 알게 됩니다. 자기 백성들에게는 예수님으로 만족하게 하시는 일을 이루어 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높아지려고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0~24절입니다.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4)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우리가 부르심을 받을 때란 예수님을 믿을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종으로 있었다면 종으로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거나 세상의 낮은 것이 아니기에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은 세상의 시각이며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21절의 각주를 보면 어떤 사본에는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이 당시의 종이란 노예입니다. 그런 노예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믿게 되었다면 하루 속히 기도하고 헌신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아 노예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종으로 살아도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종이라도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판단과 가치에 매이지 않는 이런 자유는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완성태가 들어와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1~2절입니다. “1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종이 예수님을 믿었고 주인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형제가 됩니다. 그렇다고 종이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라고 합니다. 이렇게 잘 섬김으로 유익을 받는 자가 형제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고 성공하고 높아지자고 하는 이 땅의 설교내용과 얼마나 다릅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봅니다.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1)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다른 교훈 곧 사도들이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면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그 결과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견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납니다. 교회부흥을 말하고 교회 성장을 말하면서 축복과 저주를 말하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사도들도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6~10절입니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더 부자가 되고 싶고 더 높아지고 싶은 마음은 결국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높아지려고 하면 낮아질 것이고 낮아지려고 하면 높아지리라는 말씀이 이렇게 사도들이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것으로 족한 줄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성을 아는 자들이며 그 사랑이 담긴 자들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 자족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