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10~21 기록된 대로! 2020. 1. 19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본문 12절을 봅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이라고 합니다. 유월절에 대하여는 앞에서 출애굽과 연결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은 명절에 죽이지 말자고 하지만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으셔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은 하루이지만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은 무교절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서로 붙어 있기에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무교절의 첫 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날짜 개념은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를 하루로 계산합니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디서 유월절 식사를 하시겠느냐고 묻습니다.

 

본문 13~1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중 두 사람을 보내면서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를 따라가서 그 집 주인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우리 선생님의 말씀에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전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일 것이라고 하시면서 거기서 준비하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앞날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아니다 예수님이 미리 집 주인에게 말해 놓았을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후자의 해석을 더 좋아합니다.

 

마가복음 11:1~6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합니다. 나귀를 푸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도 미리 말해 놓았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함께 걸어오셨는데 언제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미리 말씀해 두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자신이 만물의 주 이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은 왕이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신다는 스가랴 9:9절에 기록된 말씀을 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을 이루십니다.

 

본문 17~21절입니다. 저녁 식사시간에 예수님은 제자 열둘을 데리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 전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근심하며 한 사람씩 나는 아니지요?’ 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열두 명이 모두 나는 아니지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합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에 빵을 찍어 먹는 소스가 있는데 그 그릇에 여러 사람이 함께 찍어 먹기에 누가 누구인지 특정이 잘 안 되지만 가륫 유다는 압니다.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넘기려고 돈을 받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지요 하였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인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기록된 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본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셔서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도 스가랴서에 기록된 말씀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유월절 식사 자리 준비도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것도 기록된 대로 이루시기 위한 일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모든 내용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8:31절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예수님께서 구약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일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시편 22편에서 다윗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한 이 말씀을 십자가로 이루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기록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53:5).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고 합니다(53:6). 이러한 기록된 말씀을 이루시는 십자가이지만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여 말리다가 책망을 듣습니다.

 

마가복음 9:11~12절입니다.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되신 것을 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를 못하여서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말로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시며 인자에 대하여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고 하였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전혀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31~32절입니다.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묻기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지 않고 세상의 영광을 주는 그리스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2~34절입니다.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거듭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세 번째이지만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오늘 본문 17~21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나는 아니지요? 그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가룟 유다도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과 거래한 후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룟 유다를 부르셨지만 유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유다는 제자들 중에 회계를 맡고 대제사장을 만나서 거래를 할 만큼 제자들 중에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은 자신이 원한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십자가 앞에서 도망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팔려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기록된 대로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대로 되는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라면 그 길을 가도록 가룟 유다는 도움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할 줄 알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가륫 유다를 향하여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았겠다고 합니다. 만물을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위하여 지으셨다고 말씀 합니다(1:16). 그러면 가륫 유다도 예수님이 만드셨고 또 제자로 뽑은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배신할 제자를 태어나게고 하시고 제자로 뽑아놓으시고는 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도 실상은 기록된 대로 됩니다.

 

요한복음 13:18절입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예수님의 떡을 먹는 자 중에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의 배신도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시편 49:9절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다윗의 시편인데 이 말씀대로 가륫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유다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았다고 하십니까?

 

성경에 기록된 내용대로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이 내용들을 율법으로, 기계적으로, 문자대로 적용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가륫 유다만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나는 아니지요? 나는 아니지요? 한 다른 제자들도 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므로 가륫 유다만 배신자가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다 배신자입니다. 그런데 가륫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가륫 유다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 자살합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고기나 잡으러 간다고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찾아가십니다. 그러면 이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고 사도가 되었을 때에 자신들이 가룟 유다보다 나은 자라고 할 수가 없기에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다시 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십자가를 지러 가십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도 기록된 대로 갑니다. 그런데 왜 안타까워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창세기 6:6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악이 가득함을 보시고 사람 지으심을 한탄 하시고 근심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선악과 먹을 줄도 아셨을 것이고 죄가 가득할 것도 아셨을 텐데 왜 한탄하시는 것입니까?

 

5년 전에 예레미야 설교를 하면서 파토스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계적이고 문자적이고 딱딱한 율법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분노하시고 책망하시고 탄식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파토스(정념)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절대적인 이론으로 생각하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참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모든 일이 기록된 말씀의 성취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면 하나님 아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분노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십니다. 죽음의 한계에 울고 있는 자들을 보고 우십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의 탄식은 가륫 유다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우리를 향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작은 이익과 자존심과 나의 성경이론으로 무장하여 있기에 내 마음에 안 드는 예수님은 언제라도 배척하는 자들입니다. 이러다가 정말로 끝끝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배척하여 버린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전도서 4:1~3절입니다. “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 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을 보면서 전도자는 탄식합니다. 이 전도자가 솔로몬이라면 자신도 백성들을 무거운 세금으로 학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전도자의 이러한 탄식은 그 사람의 탄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한 탄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죄악을 보시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가룟 유다와 같습니다. 자기 이익에 맞지 않으면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작은 이익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구원하신다고 하시는 말씀은 어떤 인간도 자기의 자격과 조건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도 이 세대를 향하여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피 흘리시는 손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손을 벌리고 계시는데 그런 예수님은 싫다고 그 품에 안기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세상의 성공을 주는 가짜 십자가 부적과 같고 도깨비 방망이 같은 십자가로 사람이 몰려들지만,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하여 육신에 대하여 죽자는 십자가는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면 이것은 온전히 성부 성자 성령의 일하심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됨을 고백하게 됩니다(9:22, 딤전1:16, 벧후3:15). 오늘도 십자가로 우리는 부르시는 그 주님의 음성이 들려서 주님의 품에 안기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