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1~5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2020. 3. 15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오늘로 네 번째 가정에서 인터넷 영상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도 함께 보고 있겠지요? 어린이들이 부모님께 이런 질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야?’ 엄격한 집안에서는 존칭어를 쓸 겁니다. ‘아버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럴 때 부모는 대답을 합니다. 사도신경처럼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때 다시 자녀가 질문을 합니다. 전능하셔서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바이러스 하나 못 막는 거예요? 이런 질문 앞에 우리는 여러 가지 답변을 할 겁니다. 그러다가 답이 궁하면 목사님에게 물어보자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목사가 성경적인 답변을 해도 사람들은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싫다고 버린 이야기를 오늘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한 밤중에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입맞춤으로 넘겨줍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대제사장의 집에 끌고 갑니다. 새벽까지 심문을 합니다. 여러 증인이 나왔지만 일치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이 심문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그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신성모독으로 사형을 언도한 후에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요한복음 5:16~18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네 누운 침상을 들고 가라고 합니다.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가는 사람을 본 바리새인들이 네가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기를 고쳐준 분이 들고 가라고 했다는 말을 하자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듣고 안식일만 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기에 더욱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였다고 신성모독으로 몰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믿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로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유일한 한분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친 아들이라고, 하나님이 친 아버지라고 하는 말을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기에 죽여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마가복음 14:61~65절을 봅니다. “봉독 이주 전에 본 말씀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심문한 내용은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그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예수님 앞에 대제사장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신성모독으로 몰아 사형을 언도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제사장이 보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율법으로 백성들을 재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권위는 대단합니다. 율법 어긴 신성모독 자를 사형에 처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 권세로 사형 언도를 내리고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은 메시아가 하나님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혈통으로 메시아가 올 것을 구약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후손 중에 왕이 되어서 로마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굴복하는 그런 나라를 꿈꾼 겁니다. 문자대로 보면 구약의 여러 곳에서 이런 식의 메시아 왕국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백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 나라를 세우려고 하시지도 않으시고 도리어 성전을 무너뜨리라고 하시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 쫓았습니다. 이런 메시아는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두 번역으로 비교하여 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그러자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대답하셨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 “빌라도는 예수께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답변은 두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내용도 되지만, 그 질문이 네가 하는 질문이냐 다른 사람이 하는 질문이냐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내가 왕이지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이미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넘겨준 이유를 압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긴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여러 가지로 고발합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또 예수님께 묻습니다. 왜 저런 고발에 아무 대답도 없느냐고 합니다. 빌라도가 그렇게 묻는데도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법정에 세워졌으면 잘못된 고발이라면 당연히 변호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른 변론을 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고 빌라도가 놀랍게 여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아무른 변론을 하지 않습니까? 이사야 53장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같이 침묵하였다는 말씀을 이루십니다. 더 이상 변론하지 않음은 그 죽음의 길로 가시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8:33~38절입니다.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마가복음의 본문과 좀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지만 진리를 위하여 왔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이런 예수가 정치적인 왕일 수는 없다고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오늘 주보의 그림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입니다. 빌라도는 멋진 옷을 입고 밝은 빛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전하는 왕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늘에 초췌한 모습으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서 있습니다. 누가 왕과 빛과 진리로 보입니까? 세상이 볼 때는 빌라도가 왕이며 빛이며 진리로 보입니다. 어느 누가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예수가 왕이시며 빛과 진리로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의 종교에 의하여도 배척받으시고 정치에서도 배척받습니다. 대 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질문과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을 합니다. 이런 질문은 이미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와 왕에 대한 고정된 생각을 가지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정치가 합동으로 예수를 죽이는 일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종교와 정치라는 권세가 한 일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미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모든 선악의 판단을 자기중심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메시아일 수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이런 예수를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신다면서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과 이방인까지 용납하는 예수를 결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악판단의 주체가 된 자들이 종교의 권력으로, 정치의 권력으로, 경제의 권력으로 하는 일은 하나님과 사람을 핍박하고 죽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이러스 하나 못 막아줍니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고 잘못 믿는 신천지나, 믿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걸리면 예수님이 얼마나 잘 드러나겠습니까?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고 있는데 출애굽기에서는 막아주십니다. 애굽 전역에 온갖 전염병이 돌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고센 땅에는 전염병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문자대로 믿고 교회 오는 사람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걸린 사람도 교회 오면 낫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믿지 않아서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믿음이 옳은 것입니까? 지금 한국교회가 비상입니다. 이번 일을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데 목사들 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어떤 교회의 목사는 인터넷으로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교회로 모이지 않을 것이 걱정이 되어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지만 특히 교회에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그 교회를 건물로 말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성도의 모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는 당분간 인터넷으로 하는 이유는 만약 이럴 때에 모임을 강행하면 전도의 문이 완전히 막힌다고 합니다. 신천지를 백안시 하는데 교회도 똑 같다는 말을 들으면 전도가 안 되니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 역사는 어떤지 보겠습니다.

 

14세기 페스트가 발발했을 때에 중세교회는 전염병이 하나님의 재앙이기에 교회와 수도원에 모여서 기도하면 전염병을 막고 낫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수도원으로 몰려들어 얼마나 간절히 몇 시간을 마스크도 없기 기도하였겠습니까? 그 결과 마치 신천지 모임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유행하여 유럽에서 약 2,500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죽음에 일조한 것이 교회의 모입니다. 물론 이때는 종교개혁 이전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한 루터는 이럴 때에는 모임을 자제하여야 한다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지금 가톨릭은 일체의 모임을 금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교훈을 받아서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가톨릭은 수장이 있어서 하나의 체계로 되어 있기에 명령하면 다 따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개신교회는 수 백 개의 교단과 교파가 있어서 통일된 견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단의 헌법에서는 당회의 권한이 있습니다. 당회의 권한 중에 예배모범을 따라 모이는 시간과 장소를 작정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당회가 의논을 하여 지금 인터넷으로 가정에서 모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태가 계속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모이지 않은 첫째 주에 앞으로 목사도 없고 교회당도 없고 함께 모일 수도 없는 사태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는 인터넷도 없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처음에 질문을 다시 해 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전염병 하나 못 막아주시는 겁니까? 만약에 우리의 가족이 이런 명에 걸려서 고통 중에 죽어갑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여도 고쳐주지 않습니다. 더구나 어린 아이가 고통 중에 죽어가는 데도 그대로 방치하는 하나님이라면 무능한 하나님이든지, 잔인한 하나님이든지, 아예 하나님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질문의 소설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까뮈의 페스트라는 소설을 보았습니다.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페스트가 일어난 지역은 프랑스의 한 해변도시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가 격리, 봉쇄, 집단 치료시설 등의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참 비슷한 내용이 많습니다. 몇 사람의 이야기를 봅니다.

 

신부(파늘루): 여러 형제들, 여러분은 불행을 겪고 계십니다. 여러 형제들, 여러분들은 그 불행을 겪어 마땅합니다.” 이 말로 시작하여 상당한 양의 설교가 나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애굽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을 그 발아래 꿇어 앉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만하게 하느님을 대충 섬겼으니 회개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무릎을 꿇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알곡과 가라지를 말하면서 알곡이 적다고 하는 설교도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설교입니다. 오늘 이 땅의 설교들이 거의 이렇습니다. 저도 설교 중에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도 과분한 은혜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회개라는 말로 인간의 종교적인 열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증거 하는 일에 초점이 있습니다.

 

노방전도자(무명): 매일 저녁, 영험을 받았다는 한 노인이 펠트 모자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큰 거리로 나와 군중 틈으로 뚫고 다니며 하느님은 위대하시다. 그에게로 돌아오라.” 하고 되풀이 하여 외쳤으나 헛수고일 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무엇, 아마도 신보다 더 긴요하게 여기는 그 무엇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저는 이런 소설을 보면서 참으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70년 전의 소설과 오늘 이 땅의 현실이 겹쳐집니다. 지금 코로나19로 종말론을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가 지나가면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겁니다.

 

의사(리유):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이 말은 의사가 신부에게 한 말입니다. 신부도 의사와 함께 환자를 돌보면서 어린 아이의 죽음을 같이 목격한 후에 말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어떻게 어린 아이가 이렇게 주리를 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게 놔두느냐는 겁니다. 그런 창조주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직업으로 의사이지만 지금 최선을 다하여 병자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런 치료를 신에게 맡겨버리겠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검사의 아들(타루): 청소년 때 검사인 아버지의 재판을 목격합니다. 약한 죄인 한 사람을 사형언도를 내리고 총살하는 장면을 보고서는 집을 나갑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죽일 수 있느냐 하는 반항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약한 자의 편에 서는 일들을 합니다. 그래서 죽어 가는 자들을 돕기 위하여 살아갑니다. 페스트가 일어나자 자원 봉사자들 모아서 의사를 돕습니다. 그러면서 의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의사는 이 사람을 스스로 성자가 되려는 사람으로 봅니다. 이 사람도 페스트로 죽습니다.

 

신부는 의사와 함께 일한 후에 두 번째 설교에서는 좀 달라집니다. 처음 설교에서 여러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설교에서 여러분이라고 하는 말은 자신은 책망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겁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의 죽음과 의사의 말을 듣고 난 후에는 우리가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도 병으로 죽어갑니다. 그러나 의사의 치료를 거부합니다. 신의 사제가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것 자체를 수치로 여깁니다. 사인이 페스트와 좀 달라보여서 의사는 사인불명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당시의 소설의 현장이나 오늘 이 시대나 별 다를 바가 없는 삶의 내용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까? 유대인의 왕만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의 주인이 맞으십니까?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합니다(5:8).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현실에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자들, 그것도 어린 아이조차 주리를 틀면서 죽어가는 데도 방치하는 데도 그것이 사랑입니까? 몇 년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한 사람을 소개하였습니다. 아내와 딸을 병과 사고로 잃은 분입니다. 그분의 원망은 이렇습니다. 내 가족이 개, 돼지도 아닌데 그렇게 죽도록 방치하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냐는 말입니다.

 

유대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내가 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찢고 신성모독으로 몰아 사형을 언도합니다. 오늘 본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고 대답을 하십니다. 그러면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서 처형을 해야 하는데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만 풀어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종교적인 몽상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왕이라고 하는데 군대조직도 없습니다. 군자금도 없습니다. 그나마 열두 명의 제자 중에 한 명은 배반하여 팔아넘기고 나머지는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 자가 유대인이 왕이라고 하니 빌라도가 보기에는 말도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종교적인 기적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힘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다 배척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되었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세상살이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라고 전염병으로 여겼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그 분이 도대체 무엇을 십자가로 다 이루셨습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버림받음으로 처음부터 버림받은 죄인들과 함께 하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인간 무능력의 실재입니다. 사후에 종으로 삼으려고 왕들이 죽을 때에 종들을 함께 순장시켜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느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죽음의 자리로 가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버림받음은 죄인인 우리에게로 버림받아 우리와 함께 죽으시고 우리와 함께 살아나셔서 우리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일을 십자가로 이루어내십니다. 이 십자가의 비밀을 모르면 종교생활입니다. 종교생활은 신과 거래하는 기술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은 결코 종교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번 전염병으로 인하여 내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더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과연 무엇을 말씀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보지 말고 기도하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게 하여 주시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게 되었다면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말씀을 보고 기도한 것도 은혜로 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요란함에 그렇게 많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18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