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16:12-16 복이 있도다! 2021. 7. 4

 

12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지난주에 이 본문으로 아마겟돈 전쟁을 보았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예수님의 십자가 전쟁임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찾아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요약하면 요시야 왕이 죽던 장소가 므깃도입니다. 요시야 왕이 여호와께 대한 충성은 어느 왕보다 더한 왕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도 여호와께서 고쳐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죽음으로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이 애통하였습니다. 그 내용 전후의 내용이 다 그리스도의 팔리심과 하나님의 찔리심도 예언합니다. 그러므로 그 찌른 자를 보고 독자를 잃음같이 애통해하는 자들에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는 내용도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이 오순절 성령이 임하므로 일어난 것도 확인하였습니다.

 

오늘은 15절을 중심으로 봅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이 말씀은 여섯째 대접이 쏟아지는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여섯 대접이 쏟아지는 중이라도 복이 있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예수님께서 도둑 같이 오신다는 말씀과 깨어 자기 옷을 지켜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이 무언지 찾아봐야 합니다.

 

말라기 3:1~2절입니다.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 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주 앞에 길을 예비하는 사자가 나오고 그가 길을 예비하면 너희가 구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온다고 합니다. 언약의 사자가 오는데 어떻게 옵니까? 갑자기 임하시기에 누가 능히 서겠느냐고 합니다. 언약의 사자가 오늘 본문처럼 도둑같이 오신다는 뜻도 됩니다. 그가 오셔서 하시는 일이 연단 하는 불과 같은 일을 하며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은 일을 한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본 스가랴의 말씀대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3:1).

 

그러므로 주께서 임하시는 날은 갑자기 임하시기에 그날을 사람들이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주께서 임하시는 날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날을 말씀합니다. 물론 초림도 주께서 임하시는 날이며 재림하시는 날도 임하시는 날이지만, 여기서 주께서 임하시는 날은 십자가의 날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죄를 해결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에 회개하라고 합니다.

 

말라기 4:5~6절입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3:1절에서도 언약의 사자 앞에 오는 사자가 세례요한이듯이 여기서 엘리야도 세례요한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17:12,13).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친 이유는 여호와의 큰 날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큰 날에 돌이키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을 죽여 버리고 그가 증거 한 예수님조차 십자가에 죽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는 날이 여호와의 큰 날인 줄 누가 알겠습니까?

 

마태복음 24:42~44절입니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오늘 본문이 십자가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이 본문의 말씀은 언제 일어나는 일입니까? 마태복음 24장을 흔히 작은 계시록이라고 하여 예수님의 재림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저도 마태복음 설교하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재림을 중첩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차적인 초점은 십자가여야 합니다. 물론 재림도 함의하고 있습니다만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가 임하는 날은 십자가의 날입니다. 그 십자가로 구약의 성도들은 단번에 피 뿌려 흰옷을 입히시고 하늘에 앉히십니다.

 

그러면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오실 그리스도를 믿고 깨어 기다린 자들이 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그 씨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15:6). 그 씨는 그리스도입니다(3:16).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예수님이 오실 때를 믿고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8:56). 아브라함은 씨에 대한 약속과 이삭의 태어남과 제물로 바치다가 다시 얻음의 사건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미리 본 것입니다(4:17). 다윗도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22:45). 아브라함과 다윗 같은 구약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피로 흰옷을 입습니다.

 

로마서 4:1~8절입니다. “1 그런즉 1)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ㄱ)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4:17절 참조)

 

아브라함과 다윗이 일한 것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고 바울 사도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그 옷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자기 옷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 자들은 먼저 십자가로 구원받는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여주는 그 의의 옷을 입지 않고 자기 스스로 만들어 입은 옷은 더러운 누더기입니다. 거미줄로 짠 옷이기에 자기를 가릴 수 없는 옷입니다.

 

이사야 59:4~6절입니다.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인간의 행위로 만들어 입은 옷이 이 모양입니다.

 

이사야 64:6절입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입은 옷이 더러운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모습도 더러운 옷이기에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한 것도 더러운 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를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옷이 다 벗겨집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처형입니다. 그 수치와 저주와 고통을 온전히 다 받아내시는 십자가는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덮어주는 의의 옷을 만들어내시는 자리가 됩니다. ()를 한문으로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는 손()에 창()을 들고 있는 자입니다. 이 손으로 하나님을 찔러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찔려 죽은 하나님의 피가 우리에게 덮쳐오니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됩니다. 이것이 의의 옷입니다. 이 옷을 입은 자들은 이 옷을 자기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옷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런 모습을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신약의 성도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 옷을 지키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에 다른 것들을 섞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복된 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절입니다.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날도 갑자기 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그 옷을 지킨 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피 뿌림으로 영원히 단번에 의롭다고 하여 하늘에 앉히신 겁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도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흰옷을 입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 다시 오심이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 성도는 두려움의 소식이 아니라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만들어낸 더러운 옷이 아니라 주님께서 피로 입혀주신 그 완벽한 의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8~10절입니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1)드러나리로다여기서도 도둑 같이 오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은 그 피만 붙들고 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3:3~5절입니다.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이미 앞에서 본 내용이기에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간단히 봅니다. 여기서도 이기는 자들이란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들인데 이 말은 주님의 피에 다른 것들을 섞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7~18절입니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 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라서 예수님의 피로 입혀주신 의의 옷보다 자기들의 행위를 더 귀하게 여기고 있기에 벌거벗었다고 책망합니다.

 

요한계시록 7:9~17절입니다. “봉독흰옷 입은 큰 무리는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먼저 구약의 성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십니다. 이처럼 구약의 성도들을 십자가로 흰옷을 입히시고 신약의 성도도 그 십자가로 흰옷을 입히십니다. 그러므로 이 옷을 입은 자들은 주님 다시 오심이 기쁨입니다.

 

요한계시록 19:7~8절입니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마태복음 22:1~14절을 봅니다. “봉독 왕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잘났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들의 의로 치장한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불러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나는 세리와 죄인과 이방인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잔치에 가득하였는데 쫓겨난 한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예복이란 자신이 만들어 입은 옷이 아니라 잔치에 참여하는 모든 자에게 값없이 주는 예복입니다. 그런데 그 옷을 입지 않고 쫓겨난 사람은 자기 옷을 더 귀하게 여긴 겁니다. 그러므로 의의 세마포 옷을 입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요한계시록 22:12~14절입니다.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1)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여기는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의의 옷을 입었는데 그 옷에다 다른 우리의 의를 덧붙이는 일이 옷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북한군 장군의 훈장같이 더덕더덕 붙여놓은 자기의 의라는 것을 떼는 일이 그 옷을 빠는 일입니다. 이런 자들이 그 옷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