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마태복음 5:21~26   한 푼이라도     2015. 1. 25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지난주에 21~22절을 통하여 무엇이 살인인가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선생들로부터 들은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으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그 어떤 율법 선생보다 심지어 모세보다 더 높으신 분이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하면 심판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에 대하여 노하고 욕하고 미련하다고 하는 것도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것이란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아벨에 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인이 분노하여 아벨을 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분노하는 모습이 선악과 이후의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지금 지구상에 약 70억의 인구가 삽니다. 이 많은 인간들 중에 단 한명도 의로운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지옥 불에 들어가야 마땅합니다. 이런 말씀을 여러분은 달게 받아들이십니까? 이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안에 자기도 당연히 포함이 되어야합니다. 지옥 불에 들어가는 죄가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고 라가라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여도 지옥 불에 들어간다면 지옥에 들어가지 아니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나쁘고 큰 죄를 지으면 지옥 불에 들어가고 작은 죄를 지으면 벌 받는 정도이지 지옥에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큰 죄와 작은 죄가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합니다(롬6:23). 그리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롬3:10). 이 말씀만으로도 모든 인간은 다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5:17~18절을 다시 봅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가 말한 모든 말씀들을 다 이루어내셔야 한다는 말씀을 율법의 일점일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천지가 없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오늘 이 시대에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여 있는 우리도 말씀 한마디가 내 인생 보다 귀하게 보입니까? 말씀 한마디가 하늘과 땅보다 귀하게 보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 지옥 불의 땔감들이어야 마땅합니다. 

예레미야 7:31~32절을 보시면 힌놈의 아들 골짜기 도벳에 사당을 건축하였다고 합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고 되어 있는 이곳은 여호수아 때에 유다 지파가 차지한 땅입니다. 그 당시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 여부스 족속의 한 사람의 이름이 힌놈인데 그 힌놈이라는 사람의 아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으로 봅니다. 이곳에 자기 아들을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 우상의 이름이 몰렉입니다. 자식을 몰렉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이미 율법에서 금지하고(레18:21, 20:1~5)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우상을 받아들여 자기 자식을 몰렉에게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도벳이라고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고 하지 않고 죽임의 골짜기라고 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죽임 당한 자들이 더 이상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매장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이 힌놈의 골짜기란 심판과 저주의 장소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하다가 성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고서는 대대적인 개혁을 합니다. 개혁중의 하나가 힌놈의 골짜기를 부정한 것을 태우는 쓰레기 처리장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힌놈의 골짜기가 지옥의 대명사가 됩니다. 이러한 힌놈이 골짜기 즉 히브리어로 ‘게힌놈’인데 이것이 헬라어로 수용되면서 ‘게헨나’가 됩니다. 이 게헨나의 단어가 구약의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지옥이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후기 유대 민중 신앙에 의하면 여기가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는 곳으로 말하며, 복음서에서는 내세의 형벌을 받는 장소를 상징하는 말이 ‘게헨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어기면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율법의 조문을 어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마음의 동기들이 어떠하냐를 주님이 보십니다. 그러므로 형제에 대하여 노하고, 라가라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가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말씀의 뜻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우리의 형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로 결정이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은 오직 성령이 임하여야 알게 됩니다(요16:9).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고전 16:22). 제가 어렸을 때에 열심히 교회당에 다닌 것은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지옥이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옥가면 안되기에 열심히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서 저주를 받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본문에서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먼저 23~24절입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앞의 말씀 21~22절을 이어받습니다. 이 앞의 말씀의 결론이 이런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안에도 화목하지 않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이라도 그 형제에게 가서 사과하고 화목하고 나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1차 청중은 성전제사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예배와 전혀 다릅니다. 예배란 제사가 아닙니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해야 합니다. 영과 진리는 우리가 주도할 수가 없습니다. 영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예배가 됩니다. 우리의 의식과 찬양과 기도와 연보와 말씀의 선포가 있다고 자동적으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예수님은 예배할 때가 이 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듣는 그 순간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성전의 제사가 드려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에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형제와 화목하고 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배경을 구약에서 두 곳만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1:11~17절입니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성전 제사를 드리는 시대에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성전의 제사와 예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
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제사와 제물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누가 이런 것을 요구하였느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싫어하시는 이유는 제사의 뜻을 모르고 제물을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이웃과의 화목이 일어나야 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에 대하여 악행하며 선행과 정의는 없이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면서 드리는 제사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물을 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목 하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제사의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라는 예물과 형식을 통하여 신을 달래는 수준은 이방의 제사와 다를 바 없는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1~11절입니다.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수요일 저녁에 예레미야 강해에서 이미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리고 방금 본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내용입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서도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들의 계속된 죄악의 행위들을 보장받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한다고 하면서 예배를 마치 제사를 드리듯이 합니다. 이런 거짓말에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삶과 제사가 분리되고 삶과 예배가 분리되는 이런 모습이 전형적인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오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이웃 사이에 원수 된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사란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들이 흠 없는 어린 양의 피 곧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화목이 일어나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 제사며 예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 드리는 예물과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본 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듯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도 제사도 드리고 예배도 드린다는 종교형식은 얼마든지 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화목이 일어나지 않은 모든 것이 다 죄가 됩니다. 그러면 진정한 형제로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자기의 이웃을 위하여 죄 없는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과 화목이 일어나는 것이 제사의 완성이며 예배입니다. 

본문 25~26절입니다.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예물을 드리다가도 형제와 불화한 것이 있다면 화목하고 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같은 말씀을 다른 차원으로 말씀하십니다.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합니다.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서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한 푼이라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점일획’이라는 말씀이나 여기서 ‘한 푼’이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면 율법의 아주 작은 조항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다면 급하게 사화(私和)하라고 합니다. 사화하라는 말은 송사를 서로 잘 풀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고발을 누가하는 것입니까? 헬라어로 보면 고발 자는 일반 고발도 되지만 사탄도 고발자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발 자는 누구인지 말씀을 봅니다. 

요한복음 5:45~47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고발 자가 모세라고 합니다. 모세가 고발 한다는 말씀은 율법이 고발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길을 가는 동안이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입니다. 그리고 재판장이란 최후의 재판과 연결해야 됩니다. 본문에서 한 푼이라도 남김없이 다 갚아야한다는 말씀의 한 푼은 전에 성경에서 ‘호리’라고 되어있는데 이 당시에 통용되던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을 말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1원이라도 다 갚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감옥 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고발하는 자란 곧 율법이 고발하는 자가 됩니다. 이방인은 양심이 고발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런 고발을 받을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합니까? 율법이나 양심의 고발이 있을 때에 사람들의 생각이 분주합니다. 또는 설교시간에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들을 때에 흔히 교회가 무엇을 하라는 것들을 하지 않았을 때에 여러분의 머리에는 그런 말을 변호하려는 자기변호가 분주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여기면 다음 주에 올 때에 연보를 좀 더 한다든지 한 주간동안 예배에 더 열심히 참석한다든지 하는 것을 상쇄시키려고 합니다. 이러한 고발에 자기 행위로 갚아내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어떤지 말씀으로 봅니다. 

로마서 2:12~16절입니다.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 동일한 것은 율법이나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이 다 들어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이런 고발과 변명들이 항상 일어납니다. 내가 전적으로 잘못했다는 시인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적인 설교를 들으면 자기 안에 변명거리가 나옵니다. 윤리 도덕적인 설교를 들어도 자기 안에 자기를 변호하는 생각이 저절로 나옵니다. 복음적인 설교를 들으면 또 다른 변명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는 어떤 변명도 통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입으로 직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속을 지으신 분 앞에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날이 이르기 전에 한 푼도 남김없이 모든 빚을 해결하셔야 합니다.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아야 한다는 말씀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남김이 없이 다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미 설교 시작할 때에 말씀을 드린 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들은 다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듣게 되면 자신이 지옥에 가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물론 저도 주님께서 너 지옥에 가라고 하면 지금도 군말 없이 가야할 사람이 맞습니다. 그런데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게헨나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온갖 쓰레기기가 불에 태워지는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은 불에 태워지기는 하는데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통은 있지만 죽을 수도 없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 가지 않기 위하여 눈이라도 뽑고 손이라도 잘라서 가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지옥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어기면 다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대로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아야 감옥 에서 나오고 재판장 앞으로 끌려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23~35절입니다. “봉독” 나중에 이 본문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아야 한다는 말씀과 연결하여 보겠습니다. 천국의 종들과 결산하는 임금님과 같다고 합니다. 천국의 주인이 자기 종들과 결산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일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입니다.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면 일 년에 삼백일을 일해도 꼬박 20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한 달란트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동족끼리 이자를 받으면 안 되기에 원금만 갚는다고 하여도 40년을 평생 일하며 한 푼도 쓰지 않고 갚아도 단 두 달란트 밖에 갚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이 종이 갚겠다고 하였겠습니까? 자신도 먹고 살아야하기에 이런 금액은 결국 평생토록 갚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거저 참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갚겠다고 하지만 결코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전부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집으로 가는 중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도 참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갚겠다고 합니다. 백 데나리온은 백일만 일하면 갚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정말 조금만 참아주면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이 사람을 다시 소환합니다. 네가 너를 불쌍히 여겨 다 탕감하여 주었는데 너는 그 형제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어떤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만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행위로 들어가야 한다면 율법의 일점일획의 뜻과 의미도 다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으로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평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니라 나만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로 왔지만 결국 내가 지옥가지 않고 천국가려고 온 것이기에 이것도 나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무슨 수로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아낼 수가 있습니까? 

결코 우리의 능력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만 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말씀은 너에게 이런 긍휼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긍휼이 임한 자는 형제에 대하여도 긍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긍휼을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것이라고 야고보서 2: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의 빚을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으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그 한 푼, 그 최후의 한 푼인 ‘에스카톤 코드란텐’을 십자가에서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로마서 8:31~39절입니다.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랑 안에 거하시도록 조치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일로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담대하게 그 사랑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