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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31~32   이혼에 대하여     2015. 2. 8

31 또 일렀으되 ㄷ)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지난주에 간음에 대하여 말씀을 보았습니다. 간음이란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것이 간음임을 야고보서 4:4절의 말씀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이러한 간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이 이미 간음을 하면서 살고 있음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상세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간음이란 단지 세상에서 통용되는 그런 간음이 아니라 신랑 되신 하나님과 신부된 이스라엘의 관계를 통하여 간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 된 교회의 관계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간음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에서 끊어지게 만드는 것이 간음입니다. 이러한 간음이 어떤 것인지 지난주 결론부분을 다시 봅니다. 

고린도후서 11:1~4절입니다.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사도가 복음을 전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결힌 처녀로 한 남편이 그리스도께 드려지도록 중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음이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창세기에서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한다고 말씀합니다. 뱀이 하와를 미혹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간음입니다. 이러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들은 다 간음한 자들의 후손이 됩니다. 이것은 또한 살인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살인이나 간음이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증거들이라는 것을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31절을 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고 하였으나”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아내를 버리고 싶을 때에 이혼증서만 주면 이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대로 한 것이기에 죄가 아니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주어서 이혼을 하는 것은 남자들만이 하는 것이고 여자들은 이혼을 하자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혼증서를 주고 아내를 버리라는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그 원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해석한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로 삼은 본문을 봅니다. 

신명기 24:1~4절입니다.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 하게 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가 하면 샴마이 학파는 보수적인 편이라서 음행의 문제로만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고 좀 자유로운 힐렐 학파는 여자가 밥을 하다가 밥을 태워도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이혼증서를 주어서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칠거지악과 같이 사용한 것입니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시부모에게 불순한 것,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불거(三不去)도 있습니다. 유교의 영향인데 아내가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했어도 버리지 못할 세 경우는 갈 데가 없거나, 부모의 삼년상을 같이 치렀거나, 장가들 때 가난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된 경우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것이 발견되면 그것을 빌미로 아내를 내 보내는데 이혼증서만 주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해석은 기존의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해온 유대인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해석과 적용으로 들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논쟁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3~6절입니다.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합니다.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인 옳은가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창세기의 처음 결혼을 말씀하십니다. 둘이 한 몸인데 나눌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다시 질문을 합니다. 

7~12절입니다.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ㄴ)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 한 자는 받을지어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고 명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조금 전에 본 신명기 24장의 말씀입니다.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면 이혼증서를 주고 버릴 수 있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뜻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아내가 음행을 하지 않았는데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에 마땅하게 버릴 구실이 없기에 아내를 학대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바에야 이혼증서를 주어서 보내면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당시 과부는 혼자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혼증서라도 주라고 한 것이지 원래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어떤 말을 합니까?

10절에서 제자들이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버릴 수 없다면 아내가 싫어도 평생 데리고 살아야하니 장가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일 수도 있고 또 이혼하고 다른 데 장가가는 것은 곧 간음하는 것이 된다면 죄를 짓는 것이기에 장가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이 이 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타고난 자라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가가고 아니 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모태로부터 고자가 되어 나오는 자가 있고 또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가 있다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받을 자는 받으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0:10~12절을 봅니다.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마태복음과 평행구절이지만 그 결론은 조금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가는 것은 본처에게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그것은 간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간음에 대한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시는 것입니까? 모세의 율법으로 자신들의 이혼하고 싶은 마음을 합리화하여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내 보내는 것이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단지 유대인들의 이혼이나 오늘날 수많이 일어나는 이혼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간음과 이혼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신명기 24:1~4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1 아내를 맞이하여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주어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남편이 죽었다면 이미 몸을 더럽혔기에 처음 남편이 그를 아내로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은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수치스러운 일이 음행이라면 음행은 돌로 쳐 죽입니다(신22:22). 그러면 이 수치스러운 일로 인하여 이혼을 당한 여인이 무엇으로 이혼을 당한 것입니까? 원어를 보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수치스러운 말입니다. 즉 진리가 그 안에 담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이 없는 자들이 이혼을 당하는 것인데 이러한 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인다면 본 남편이 간음하는 것이 되며 또한 그 약속의 땅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레미야 3:1절을 봅니다. “1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신명기 24장의 말씀과 예수님의 간음과 이혼에 대한 말씀과 다 연결이 됩니다. 율법의 의하면 아내를 버렸는데 그가 타인의 아내가 되었다면 처음 남편이 다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받으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진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남편 되신 여호와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남편을 떠나 간음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이혼증서를 주셨다는 것은 굉장히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이혼증서를 받은 북 이스라엘이 간음한 앗수르에 망하였습니다. 그러면 남 유다는 그것을 보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오히려 더욱 음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음행의 모습들을 예레미야 2:13~37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의 두 가지 악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입니다. 이 터진 웅덩이를 채우기 위하여 온갖 창기의 짓을 다하는 것이 바로 음행이며 간음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짓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다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간음은 발정기의 짐승과 같다고 합니다. 이러한 음행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이혼을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레미야 3:8~10절입니다. “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 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9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북 이스라엘이 음행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남편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증서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남 유다가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행음합니다. 성경의 행음이란 온갖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다를 다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됩니까? 이혼당한 여인을 처음 남편이 다시 받아들이면 이것도 간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남편 되신 하나님께서 이혼당한 아내인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간음도 남편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4~18절입니다.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17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18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그들이 함께 이르리라”

북 이스라엘이든 남 유다이든 모두가 음행하여 남편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혼증서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는 것이며 남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은 영원하시기에 그러한 음행한 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시는데 성읍에서 하나 족속에 둘을 찾아 와서 새로운 목자를 세우십니다. 그럴 때에 다시는 언약궤를 말하기 않고 생각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언약궤 안에 무엇이 담겨있습니까? 율법입니다. 율법의 조문대로 하면 모두가 다 간음한 자이기에 버림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말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새 언약을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셔서 음행하여 버림받은 신부를 완전하고 거룩한 신부로 만들어내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성경의 계시입니다. 

호세아 2:14~20절입니다.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세아 선지자가 처음부터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합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다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갑니다. 이러한 음란한 여인을 값을 주고 다시 데리고 와서 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음행을 했으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다시 값을 주고 사옵니다. 이런 여인과 다시 결합하면 남편도 간음을 하는 것이며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행한 고멜을 값을 주고 데리고 와서 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장가듦으로 인하여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모든 음행을 주께서 대신 해결하시고 우리와 영원힌 결혼하여 주심으로 압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7:1~6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옛 남편 율법의 남편이 성도에게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옛 남편 율법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일점일획도 남김이 없이 그 모든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로 해결하셨습니다. 이게 그리스도가 우리가 영원한 남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간음과 음행들을 죄 없으신 분이 스스로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그 다 이루신 의의 선물을 그의 영으로 자기 신부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 영을 받은 신부들이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교회라고 합니다. 이런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간음을 하지 않는 것이며 이혼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흔들려고 하는 것이 바로 다른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더 이상 율법이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남편이 죽었다는 말은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처음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이기에 이것이 간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2:13~19절입니다.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우리를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 곧 율법이 우리에게 살아있다면 우리는 늘 간음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함께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옛 남편과 이혼을 한 것입니다. 이제 새 남편과 영원히 살아야합니다. 이 새 남편은 우리의 모든 저주를 대신 받으신 남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내의 가치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신랑의 공로만 드러납니다. 이러한 신부가 되기 싫어서 스스로 단장하고 싶어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이혼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돌아갈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다시는 이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요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