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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43~48 원수를 사랑하라 2015. 3. 1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고 하시는 말씀이 계속하여 반복됩니다. 5:18절에서 너희에게 이른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는 율법을 폐하고 파괴하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그 율법을 다 이루신 자리는 이미 우리가 본 대로 십자가입니다. 그곳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기에 이 다 이루심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일까지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알고 전한다고 합니다.

 

5:20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지만 이들의 의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율법지킴의 행위, 그것도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는 행위가 예수님을 배척한 자기 의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보다 나은 의란 율법 외에 나타난 믿음으로 나은 의여야 합니다. 이 의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믿을 수 없기에 오직 은혜로만 믿게 됩니다.

 

너희가 이렇게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는 이 내용으로 살인과 간음과 맹세와 보복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결론에 해당하는 원수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느냐 아니냐에 따라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느냐 아니냐가 됩니다. 이런 내용은 이미 모세를 통하여서도 증거 되었습니다(18:15, 7:37).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이러한 절대적인 권세를 에베소서 1:10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또한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2:10~11). 이런 말씀에 아멘이 되십니까?

 

본문 43절을 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지킨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은 사실 성경에 없습니다. 이곳저곳의 말씀을 조합하여 자기들 중심으로 재편집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근거라고 하는 것을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찾아본 내용으로 네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은 레위기 19:18절에서 근거하고 네 이웃을 미워하라는 것은 직접적인 내용은 없지만 신명기 7:2, 30:7, 시편 139:21~22절에서 원용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의 쿰란 공동체 규율집이라는 것에서 빛의 아들들 모두를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 모두를 미워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들었다는 것은 자기들이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할 사람을 미워하겠다는 선악과의 지식으로 성경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는 예외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선악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만족과 나의 유익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기는 보아도 나를 중심으로 보고 설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자기중심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새롭게 성경을 자기중심으로 편집하여 보는 것입니다. 이로운 내용은 당겨오고 해로운 내용은 밀쳐 내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벗어날 자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뜻과 의도들을 성경을 빙자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 대하여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떠한 지식과 경험과 판단들도 다 주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내려놓을 수 없기에 주의 백성이라면 주의 말씀의 능력이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우리를 먼저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시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본문 44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아멘을 할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나를 위하여 말씀을 이용하고 살았는지를 고발당하는 순간이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이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지금 성령으로 인하여 주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다면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능력입니다. 그동안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자기중심적인 성경의 해석과 적용이 틀렸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반발하여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성경의 말씀들을 지킨다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말씀을 내 마음대로 재해석하고 편집하여 나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라면 말씀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는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저도 한때 산상수훈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으로 기도를 한 것입니다. 원수처럼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사랑이 안 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원수도 아닌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회개하면서 사랑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막상 그 사람을 대하면 사랑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안 됩니다. 더구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는데 나를 핍박하고 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가 됩니까? 그들이 폭삭 망해서 나한테 와서 삭삭 빌기를 원하는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본문 45절을 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구원을 받을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원수는커녕 가족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무슨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고 하십니다.

 

48절에는 이런 하나님처럼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이 말씀은 저로 하여금 더욱 절망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이웃을 위하여 아낌없이 내어 놓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과 영화까지 나오고 지금 칠원에서 그 기념관 까지 만드는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도 있습니다. 자기 두 아들을 죽인 빨갱이를 용서하여 달라고 청원하여 자기 양아들로 삼은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은 정말 원수를 사랑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존심 때문 일 수 있습니다. 내가 목사인데 목사가 원수 정도는 사랑해야지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질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경우를 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말로 주의 은혜가 넘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본인도 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인간의 사랑이나 순교라는 것들이 어떤 모습인지 보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순교자로 보이지만 배신자가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배신자로 보이지만 순교자 일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김은국씨의 순교자라는 소설과 영화에서 잘 다루어집니다. 북한의 어느 지역에 14명의 목사들이 북한군에 잡혔는데 그중에 두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12명입니다. 여기서 누가 순교자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죽은 12명은 공산군에 항복한 자들이고 살아남은 자는 항복하지 않는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12명을 순교자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문제를 다룬 최근의 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시선입니다. 종교적인 허상들과 무엇이 진짜 배신인지를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시본문 45절을 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는 자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데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어 주시기 때문이며 그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해도 비치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죄인이라서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선악과 이후의 어떤 인간의 판단도 다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46~47절입니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여기에서 벗어날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랑이란 누구든지 다 하는 것입니다. 흔히 끼리끼리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그런 것은 정치가도 조폭도 종교인도 다 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결국 자기들이 속한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얼마든지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죽 하면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면 공동의 적이 생겼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적의 적은 나의 동지가 됩니다. 이런 인생들이 다 똘똘 뭉쳐서 참된 이웃을 살해한 사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4:25~27절입니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그 영을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시자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증거 합니다. 그러자 이들을 핍박합니다. 그 핍박을 받은 자들이 시편 2편의 말씀의 인용합니다.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 시편 2편의 말씀대로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였지만 예수의 일로 당일에 친구가 되었습니다(23:12).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 하는 자들을 여전히 핍박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 된 증거입니다. 이렇게 원수 된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5:6~10절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 되고 그의 살아나심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의논하고 물어보지 않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와 무슨 의논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을 따라 자기 백성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름 받아 믿는 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랑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란 악인과 의인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입니다. 햇빛과 비라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표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햇빛과 비가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안식입니다. 이것을 율법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은 노동금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이 인간의 노력으로 오는 것이 아님을 안식을 통하여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 안식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40년 후에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서는 창조의 이야기가 아니라 애굽에서 구원받았기에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 모두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는 세상에서 말하는 악인과 선인이나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미 선악과 이후의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악인과 선인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차별은 인간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 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차별과 판단은 선악과 이후에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 의와 불의를 나누고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이들에게 햇빛과 비를 동일하게 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반드시 자기는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요한복음 17:19~26절입니다.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이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만 하실 뿐만 아니라 이 기도의 내용을 실제로 이루어내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는 이유는 자기 백성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들인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로, 즉 사도들이 전한 복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성도가 다 하나가 되어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의 그 관계 안에 하나가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온전함입니다.

 

요한복음 17:23절에서 온전함이 이룬다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의 일을 이루어내신 결과로 온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온전함이 이루어진 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고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고 믿습니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백성들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만드셔서 창세전에 그 아들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원수 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피로 구속하시고 자기와 하나 되게 하신 이유는 그 창세전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그 아들의 영광이 목적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자들은 자기의 어떠한 행위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하나님의 원수 사랑만 자랑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