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다운받기]

         마태복음 6:1~4   구제에 대하여   2015. 3. 8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5장과 6장을 우리가 보는 성경은 구별을 해 놓았습니다만 처음 이 말씀이 기록될 때는 구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은 앞의 5장에서 계속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앞의 5장에서 오늘 본문과 연결이 되려면 5:20절을 먼저 봐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란 율법의 행위로서 흠이 없다고 할 정도의 의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가 무엇인지 유대인들이 알고 있다는 율법의 기준인 살인, 간음, 맹세, 보복, 사랑 등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율법을 따라 살인과 간음과 헛맹세를 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을 다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빛이시기에 그들의 숨겨져 있는 의도들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말씀이기에 잘못된 말씀들로 무장한 그들을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그들이나 오늘 우리나 간에 우리는 다 살인자이며 간음자이며 헛된 맹세를 남발하는 자들이며 날마다 보복을 꿈꾸며 삽니다. 땅에서 보복이 안 되면 저 세상에서라도 보복하려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다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원수를 사랑하신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온전합니다. 

마태복음 5: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온전한 사랑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온전한 사랑을 값없이 거저 받았기에 선물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온전하다고 합니다. 이 온전함이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에 그 사랑이 넘겨진 자는 온전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에게서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17:1절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땅과 씨의 약속을 받은 것이 창세기 12장입니다. 그 후로 많은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방패이며 큰 상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자기는 자식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이것을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인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이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리지 못하고 아내의 말을 듣고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때가 아브람 86세입니다. 

방금 읽은 창세기 17:1절을 보시면 아브람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완전할 수가 있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란 하나님의 자기 약속에 전능하시기에 아브람에게 씨를 주신다고 하셨으면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하여 하갈을 취하여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육신의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3년을 더 지난 후에 아브람 99세 때에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합니다. 이 완전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으로 이루어 낸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완전함이며 온전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어내심을 믿는 것이 완전한 것이기에 아브람은 할례를 행하여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후에 약속의 자녀 이삭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이 무엇인지 로마서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로마서 4:17절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를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완전한 것입니다. 이 완전한 믿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요한복음 8:56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완전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성취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가 온전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제 자기의 것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을 넘겨주게 됩니다. 이것을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1차 청중은 아직 모릅니다.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 나서 무엇을 증거 하게 되는지 사도들이 증거 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6:1절을 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20절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나은 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전함과 아브라함에게 완전 하라는 말씀과 연결시켜 보았습니다. 온전하고 완전한 의란 사람에게서 결코 나올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 성취로 인하여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성취의 선물 곧 십자가로 완성된 사랑을 넘겨받는 것, 곧 그 아들을 선물로 받는 것이 온전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이 선물을 받으면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본문 6:2절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한 말씀 중에 오늘은 구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의의 선물을 받지 못하였기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의의 선물을 받지 못하였기에 결국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외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며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사람 앞에서냐 하나님 앞에서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 안에 있다면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사람의 눈치밖에 볼 것이 없습니다. 이런 자는 결국 사람 앞에 인정받고 영광받기를 원한 것이니 이미 자기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은밀하게 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고 하는 말씀으로 연결하여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구제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자기 스스로 뿌듯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은 스스로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얼마든지 은밀하게 구제를 합니다. 연말이 되면 구세군 냄비에 억대가 넘는 돈을 무명으로 넣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구제를 왜 명하신 것일까요? 

신명기 10:17~19절입니다.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 고와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신 것은 너희가 애굽 땅에 있을 때에 나그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를 통하여 너희가 구제 받은 자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구제가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도 구제입니다. 그러므로 구제를 단지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그런 구제는 세상 사람들도 다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도 알고 성경을 몰라도 그렇게 하는 것을 더 큰 선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단지 구제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시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이 성전에 가다가 구걸하는 자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성전 미문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개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그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교회가 주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물론 구제할 수 있으면 해도 됩니다. 우리 교회도 구제를 하고 있습니다만 돈을 주는 구제란 교회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참된 구제란 예수의 이름을 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37~41절입니다.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 손을 씻지 않으심을 보고 이상히 여깁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바리새인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겉과 속을 다 만드셨다고 하시면서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고 하십니다. 정결문제에서 왜 구제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구제하면 구제 받은 사람의 살림이 나아져야 하는데 구제하면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구제를 하지 않았습니까? 구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깨끗해지는 구제는 사람의 속에 있는 탐욕과 악독으로 어떤 구제나 선교나 자기 목숨을 내어주어도 깨끗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18~25절입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 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참된 구제는 금과 은이 아니라 흠도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곧 복음으로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제란 내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었는데 선물로 받은 것을 주는 것이 구제입니다. 거저 받았기에 거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구제라는 이름이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든 간에 내가 한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 그 고백이 나오는 자는 자기가 무엇을 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오른편으로 한 것입니다. 왼편에 있는 자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25:31~33절입니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우리가 잘 아는 최후의 심판에서 양과 염소를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과 연결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오른 손과 왼 손이라는 말이 헬라어에서 손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5장의 오른 편과 왼편으로 라는 단어와 오른손 왼손이라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면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오른 편의 양이 한 것을 왼 편의 염소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5:34~40절입니다.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고 합니다. 이들이 오른 편에 속한 자리입니다. 오른 편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의 특징은 자기들이 한 것이 없다는 자들입니다. 물론 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에게 한 것이지만 이것이 정말 은혜로 한 것이기에 나의 나 된 것이 은혜라는 고백으로 나온 자는 바울 사도처럼 내가 아니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또한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것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눅 17장). 이런 자들은 자신이 행한 것은 죄 뿐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42~45절입니다.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왼편의 사람들은 은혜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행위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말로는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고 은혜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속으로는 마일리지 쌓아두듯이 차곡차곡 쌓아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했고, 내가 저것을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아직 자기 죽음이 일어나지 않은 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구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제를 받은 자는 묵시 속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이 역사 속에서 자신이 부인당하고 삭제당하여 갈 것입니다. 성도라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에 속이 쓰리고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영원한 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를 구제하고 있기에 일어나는 현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제라는 말이 긍휼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구제와 긍휼을 받은 자는 그 긍휼과 구제를 이웃으로 흘려보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