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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27~30   간음에 대하여     2015. 2. 1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구약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지만 신약은 성령이 임하였기에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의 어느 말씀을 온전히 제대로 지킨 것이 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하나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언약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 약속을 이루어내시는데 그 약속의 완성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그 때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이 지킨다는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율법에 대하여 듣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들이 율법을 제대로 해석하여 적용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율법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보여주시는 말씀이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이웃과의 관계, 자선, 금식 등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너희에게’라고 하신 이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27~30절을 통하여 간음에 대하여 봅니다. 대부분 31~32절을 함께 보지만 제가 구별한 이유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이 간음과 이혼을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이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본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오늘 보는 간음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문자대로 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떡거리게 되는 윤리와 도덕의 법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모두 다 외우는 십계명중 제 7계명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간음을 하지 않았다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이 말씀에서는 자유롭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행위로서 간음을 하지 않고 단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자유로울 사람이 있습니까?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 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대한 해석을 이렇게 들었습니다. 새가 머리위로 날아가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새가 자기 머리위에 둥지를 터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떤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막을 수가 없지만 그 여인을 상상하면서 자기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그것이 간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석해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은 아직 율법을 모릅니다. 

로마서 3:19~20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그 완성된 의를 성령으로 사도들에게 넘겨주시면 율법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단지 간음하지 말라는 그 말씀이 행위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간음하지 않았느냐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이라고 말입니다. 살인도 살인의 행위만 살인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이미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증거들로 간음과 살인이 나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온갖 악한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으로 보고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 있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여자를 보고서도 음욕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음욕을 품는 그 자체가 이미 마음에 간음과 음란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음을 했다면 눈을 뽑고 손을 잘라서라도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간음에서 왜 눈을 뽑고 손을 잘라야 합니까? 견물생심입니다.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볼 때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여 손을 들어 따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눈을 뽑고 손을 자른다고 해서 음욕이 일어나지 않을 까요? 불교에서도 금욕을 가장 중요한 해탈의 수단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머리 깎고 세상을 보지 않으려고 삿갓을 쓰고 산으로 들어갔지만 음욕을 어떻게 하지 못하여 금욕적인 행위를 하는 것으로 해탈을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 것 만한 것 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여기서 난다고 하지만 이미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간음이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서 스스로 자기를 살려야하는 상태가 이미 간음한 것입니다. 피조물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자기의 힘으로 살겠다고 나선 것이 간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7계명이지만 이 간음에 대한 것도 결국 탐심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10계명에서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네 이웃의 아내입니다. 결국 간음의 문제도 마음의 탐심이며 이 탐심은 선악과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 탐심이 곧 간음이며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악은 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죄악의 씨앗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씨란 온도와 습도가 맞으면 발아하듯이 우리 안에 탐심이라는 죄는 그 환경만 맞으면 얼마든지 발아합니다. 3천 년 전에 지어진 피라미드 안에 들어있던 밀알을 심어보니 싹이 나더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악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서 죄가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이 무엇입니까? 단지 남녀 관계의 간음만이 간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근원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근원은 사람의 마음이고 그 마음은 이미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나 종교의 경전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 도덕이나 종교의 경전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주체로 대접합니다. 결국 모든 결정은 사람의 자기 선택에 달려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태도가 이미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서 간음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여 내셔서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데 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부분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는 것인데 그것을 성경은 간음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23:1~4절입니다.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3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북 이스라엘을 사마리아로 남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부릅니다. 남북으로 나누어 졌기에 자매라고 부르는데 둘 다 애굽에서부터 행음하였다고 합니다. 이미 에스겔서 설교할 때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애굽에서부터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따라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여 광야로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민수기 25:1~4절입니다.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이것은 실제로 음행한 사건입니다. 이때 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가는 중에 이스라엘의 시므리라는 사람이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자기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비느하스가 창을 찔러 죽입니다. 이로 인하여 염병이 멈추었지만 2만 4천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에스겔 23:8~11절을 봅니다. “8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10 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 11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의지하다가 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가 언니인 사마리아가 망하는 것을 보고서도 그 형보다 더 음욕을 품어서 앗수르가 약해지니 나중에 바벨론을 의지하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간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물론 남녀 간의 음행도 마땅히 간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의 문제를 드러내면서 근원적인 간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말씀을 보게 되면 성경에 있는 모든 죄는 다 자신의 죄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입을 닫게 됩니다. 

에스겔 16:60~63절입니다.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에스겔 16:1절부터 보아야 합니다만 본문이 길기에 간단히 요약합니다. 에스겔서 23장과 함께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태어나면서부터 거리낌을 입은 계집아이로 묘사합니다. 요즈음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유아처럼 탯줄도 잘라지지 않은 채 들판에 버려진 계집아이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살리시고 예쁘게 자라게 하셔서 자신의 신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모든 것으로 하는 짓이라고는 바람만 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하체가 큰 남자라고 노골적인 표현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음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한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간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음한 여인을 하나님은 심판을 하십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이렇게 심판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남기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남은 자란 반드시 심판을 통과한 자들을 남은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남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데 그 용서의 근거는 에스겔 16:60~63절을 보시면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세운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늘 언약을 배반하였지만 하나님의 자기 언약은 영원하시기에 그러한 자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리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여호와를 알게 된 자는 자신의 간음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그 간음이 용서 받은 것을 알기에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모두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으로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 이렇게 용서 받은 자들이기에 자신의 그 어떠한 행위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자기의 행위로 자랑하는 것들이 바로 신랑과 멀어지는 간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3~11절입니다.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아온 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세우고 모세의 율법에 이러한 자를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율법을 어기는 자로 몰아가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비를 건 것은 예수님께서 모세보다 더 높은 권위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든 전통과 유전적인 해석들을 거부하시고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양심에 가책을 받은 자들이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다 떠나고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너를 고발하고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으시자 없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시 않으신다는 것을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간음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도 충족할 뿐 아니라 그 여인도 용서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요? 그 여인이 평생토록 간음하지 않고 살까요? 물론 은혜를 죽다 살아난 은혜를 입었기에 그런 음행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다른 생각은 없었을까요? 그러므로 죄를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그 죄는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은 성령이 임함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음에 대한 말씀을 더 봅니다. 

야고보서 4:4절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간음한 여인들아 앞에 1)이라는 각주를 보시면 간음하는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며 특히 성경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신부 곧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 받은 교회 곧 여자들이 무엇을 하는 것이 간음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과 벗되고 하는 것이 바로 간음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교회라고 모여서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본 골로새서 3장의 말씀처럼 탐심 곧 땅에 대한 탐심이 우상숭배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곧 간음입니다. 

1월 둘째 주 진해지역 SFC 수련회 중에 수요일 저녁에 어른들이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학생들이 3박 4일 수련회 참석하면 수능점수 3~4점을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약 10대 1일로 성적이 오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갈라디아서의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을 3박 4일 수련회 보내는 그 마음에는 하나님께 잘 보이면 아이들 성적이 올라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이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탐심이며 우상숭배이며 간음입니다. 지난주일 오후 부산 부곡중앙교회 교사 헌신예배 때도 위의 질문을 했습니다. 전체 교사 약 50여명이 함께 앉아있는데 성적이 오른다는 대답이 거의 대부분의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이 고신이나 합동이라는 보수교단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번영신학을 전하는 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성경만이 계시라고 하는 보수교단마저 왜 이르냐고 하면서 자기도 천국 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 천국 가는 길 가로막는 교사가 되지 말고 제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교사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6:9~11절입니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교회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게 만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미혹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을 동원하여 아주 그럴 듯한 말로 속이는 것이 미혹입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는데 쪼그라들어야 하느냐며 저에게 화를 낸 목사도 있습니다. 우리도 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세상을 사랑하는 간음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물을 받은 자들은 이제부터 세상과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그리스도에게 드리도록 중매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1~4절입니다.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사도들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파하는 것이 바로 간음하게 하는 것입니다. 뱀이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부패할까 두려워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덧입을 때에 정결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입은 옷은 누더기입니다. 더러운 옷입니다. 우리가 만든 옷으로는 절대로 우리의 더러움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신 그 의의 옷을 입은 자만이 정결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이것이 간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 보혈의 능력 안에서만 정결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