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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6:5~8    기도할 때에    2015. 3. 15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는 모든 사람의 본능입니다. 종교가 있건 없건 간에 기도는 다 합니다. 무신론자는 자기 자신에게 빌고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祈禱)라는 말은 빌고 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빌고 비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무엇을 기도합니까?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이루고 싶은 것이 자기 힘으로 되지 않으니 자기보다 강하고 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에게 빌고 비는 것입니다. 이런 비는 일은 우리의 조상들의 주특기입니다.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빌었습니다. 천지신명은 천지의 조화를 맡고 있는 신령이라는 뜻입니다. 천지가 나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 천지를 조화롭게 하는 대상에게 나의 정성을 바쳐서 내가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 보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그런 천지만물에 기도하는 것 보다 그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효력이 있다고 전도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와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대상에 대한 이름만 바뀌었지 그 비는 내용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름을 불러놓고서는 나의 소원을 잔뜩 아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면 기도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잘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니 온갖 방법론을 다 동원합니다. 철야, 금식, 릴레이, 작정, 중보, 강청 등의 이름을 성경구절을 따 와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런 기도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기 위하여 제가 처음으로 주제 설교한 것이 기도입니다. 2009년도에 시작하여 약 2년간 백번에 걸쳐서 수요일 저녁에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알고 싶으신 분은 사이트의 설교모음에서 기도를 보시면 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주제 설교는 성경에서 간구하고 호소하고 부르짖는 내용들을 다 찾아보았습니다. 시편은 그 당시에 오후에 강해를 하고 있었기에 시편에 아주 만은 호소들이 있지만 시편은 제외하고 성경 전체에서 기도의 내용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기도하며 외우는 방법도 알려줍니다. 333과 77에 대하여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33:3절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이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는 말씀으로 지금 답답한 현실에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여서 크고 비밀한 일을 알려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신비주의자들도 잘 사용합니다. 바로 앞의 말씀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일을 행하시고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시기에 부르짖어 기도하면 어떤 일이든 만들어 성취하신다는 말씀까지 덧붙여서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알게 하신다는 내용은 예레미야 31장부터 말씀하시는 새 언약의 성취를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으로 자기의 사적 소원성취로 말합니다. 

77은 마태복음 7:7절입니다. 이 말씀을 곧 보겠습니다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것이란 평행구절이 누가복음 11장에 보시면 성령입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받는 가장 좋은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기 죄가 무엇인지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내용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 안에서 기도해 주셔야 됩니다(롬8:26).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기에 성도는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십니다(롬8:34).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환난과 핍박과 죽음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과 예수님의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려고 세상의 소유들을 늘려달라고 합니다. 

기도에 대한 설교 처음이 창세기 4장의 피의 호소였습니다. 하나님께 아뢰고 호소하고 간구하는 처음 내용이 아벨의 피의 호소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의인입니다. 의인의 피를 흘렸기에 이 땅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에 대한 마지막 설교의 내용도 피의 호소입니다. 요한계시록 6:9~11절입니다.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피의 호소에서 피의 호소입니다. 이들은 다 구약과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 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의 가진 증거를 미워하는지 그 말씀을 증거 하는 자를 죽여 버린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하여 기도하는 자가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빌립보서 3:18~21절입니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 욕망과 땅의 영광이라면 이런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동안 수많이 기도를 하였겠지만 그 기도가 거의 대부분 자기의 욕망(배)을 신으로 삼고 기도한 십자가의 원수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의 자랑거리를 위한 기도를 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제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동안 엉터리 기도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내용을 살펴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지난주에는 구제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는 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가면을 쓴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도시간이 정하여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언제 기도하라는 그런 말씀은 없지만 유대인들의 전통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하루에 세 번 창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단6:10). 사도들도 정한 시간에 기도하려 성전에 갔습니다(행3:1). 이들의 기도는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성전이나 회당에서 기도합니다. 기도 시간에 맞추어 가다가 늦으면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는 이 말은 이미 사람들에게 보이기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기도 시간에 좀 늦게 가다가 시간이 되면 큰 거리어귀에 손을 들고 기도하면 얼마나 거룩해 보이겠습니까? 이런 것은 구제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 것이기에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도할 때에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몰래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신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집에 골방이 없는 사람은 골방을 만들어야합니까? 그런 말이 아니겠지요!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하는 집의 가장 은밀한 장소는 지성소입니다. 그러면 지성소로 들어가서 기도해야 합니까? 지성소는 일 년에 대 제사장이 단 한번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아무나 들어가면 죽임 당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성전을 헐라 하시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마27:51). 그 휘장이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합니다(히10:2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그 영혼이 떠나가신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넘겨주셨습니다(요19:31). 그러므로 그 영을 넘겨받은 자가 성소가 되며 그 가장 은밀한 곳이 지성소라는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기에 이제 지성소가 성도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주여, 주여 부르짖으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알 수 없게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기도라는 것이 너무나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이 가득합니다. 대표 기도하라고 하면 왜 힘이 듭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니 힘이 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다면 그 분과의 사귐을 드러내면 됩니다. 하나임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그런데 기도라는 것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야 기도가 된다는 것은 종교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물론 함께 모여 기도하지 말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자주 모여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런 기도란 성경에도 나옵니다. 각처에서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합니다(딤전 2:8).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가면 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은밀한 기도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가 새벽기도를 일찍 마치고 나가니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 교회 와서 이상한 소리로 끝까지 기도하다가 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목사가 평신도 보다 기도도 덜 한다고 흉을 보더랍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전형적인 외식입니다. 주의 영이 임한 자라면 그런 식의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의식하든 하지 않던 성령이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면 나도 그것을 인식하게 됩니다(롬8:16).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이라는 인식이 됩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사귐이며 기도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重言復言)은 한문으로 무거운 말을 다시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는 말이 어눌하여 더듬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주술적으로 기도하는 내용을 말합니다. 이런 기도의 태도는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이방인의 기도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방인의 기도와 같은 방법이 사도신경 백면을 외우라고 하든지 주기도문 천 번을 외우라든지 하는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을 주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방인의 중언부언의 기도와 같은 형식입니다. 이렇게 내가 수천 번의 기도를 정성을 다하여 바치면 하나님이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24~28절입니다.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이런 모습이 대표적인 이방인의 중언부언의 기도입니다. 무당들이 굿을 하는 것을 보면 이와 비슷합니다. 밤새도록 꽹과리와 북과 장구를 동원하여 주문을 외우고 춤을 추고 대를 흔들고 심지어 작두도 타면서 초혼을 하고 그 신의 말을 받아 전한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나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철야를 하면서 주여 삼창을 하면서 목소리 높여 부르고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복음을 듣고 나면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나의 욕심 아닌 기도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정욕을 위하여 기도하면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속은 사실 자신의 욕심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영광도 따로 챙겨보겠다는 식의 거래하는 기도가 거의 다입니다.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와 달리 엘리야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열왕기상 18:24~28절입니다. “봉독”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기도한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우상숭배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철야와 금식과 몸의 상처까지 내는 그런 기도들이 얼마나 자기를 위한 기도인지를 안다면 이런 기도를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합니까?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가다가 길에서 잡니다. 그곳이 루스입니다. 꿈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한 내용을 야곱에게 주십니다. 야곱이 깨어 일어나서 그곳을  벧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까지 떠나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지 못하여 서원을 합니다(창28장). 약 20년이 지난 후 다시 벧엘로 돌아옵니다. 야곱이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외삼촌과 외사촌들의 안색이 바뀌는 것을 보고 야반도주합니다. 그래서 돌아오다가 얍복강에서 깨어지고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었지만 또 다시 세겜에 머무르려고 하다가 디나 사건으로 인하여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 벧엘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다시 20년 전의 그 언약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합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집에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 엘벧엘입니다. 벧엘에서 벧엘까지 20년 동안 야곱이 배운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알기에 이제 서원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빌고 또 빕니다. 그러면 성도는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까?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이미 주님이 다 아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아버지가 없는 자들이나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아들의 영이 임하여 아버지를 부를 수 있다면 나의 필요를 따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1~34절입니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식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들은 자기가 자신을 살려야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아들의 영을 넘겨받은 자들은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가 없는 고아는 내일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아들은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이방인인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때에 우리가 더욱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여야 합니다(벧전 4:7).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가 어느새 이방인의 기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이방인의 기도가 아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