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17~22   말씀의 능력    2014. 9. 21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지난주에 말씀을 이루려고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심도 물로 세례를 받으심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도 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보면 이방인들과 뒤섞여 살아가는 흑암의 땅인 갈릴리 지역으로 물러가시는 것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증거 한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자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가셔서 흑암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불러내시는 것이 천국을 만들어 내시는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17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십니다. 천국의 선포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왜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시작하십니까? 예루살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결국 목 잘라 죽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물러가셔서 천국을 시작하시는 이유는 예루살렘은 갈릴리보다 더 캄캄한 어두움의 자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루살렘의 시각으로 어두움이라고 하는 갈릴리에서 제자를 부르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내용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회개와 천국에 대하여 먼저 말씀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란 욥기에서 잘 나옵니다. 욥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동방에서 경건하고 의롭다는 욥이 하루아침에 재산 다 날아가고 자식들 다 죽고 몸은 병들었습니다.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욥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때에 욥의 친구들이 와서 하는 말이 네가 이렇게 된 것은 죄로 인하여 일어났기에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욥은 그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논쟁이 계속됩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는 말이 오늘날 목사들이 하는 말과 같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어려움에 처한 것은 무언가 죄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면서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그동안 헌금 안한 것, 예배 빼 먹은 것 등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회개를 하면 지금은 비록 미약하지만 나중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기에 심히 창대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회개를 말한 욥의 친구들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욥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 받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십니다. 물론 욥도 나중에 회개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롭다고 여겨서 하나님께 따진 것을 회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회개라는 것이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회개라면 이것은 회개가 아니라 신에게 잘 보여서 지금의 상황을 바꾸어보겠다는 식입니다. 이런 것은 회개가 아니라 오히려 지옥으로 가게 만드는 일입니다. 회개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서 돌이켜서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회개라는 것들은 내가 목표로 하고 가는 길에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면서 회개한다면 이런 것은 회개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그런 회개란 스올입니다. 

시편 49편을 봅니다. 1~4절입니다. “1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2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3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4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들으라고 합니다. 빈부귀천이 다 추구하는 바는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5~9절입니다. “5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에워싸는 환난의 날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들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날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여도 아무도 자기 형제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속량이란 재물로는 영원히 할 수가 없습니다. 재물이란 사람의 피와 땀을 쏟아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속전을 바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재물이 많아서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다고 그런 자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까? 

10~13절입니다. “10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 그러나 그들의 속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13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빈부귀천 유무식간에 그렇게 원하든 재물을 다 남겨두고 떠나게 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도 재물을 남겨두고 떠날 것입니다. 현대는 10조가 넘은 땅을 구입하였습니다. 이들의 속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며 그들의 토지는 자기 이름으로 부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이 짐승의 나라입니다. 

이들의 결과는 14절입니다.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그들의 아름다움이 소멸하고 그들의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바로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영광이 될 것들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움들이 다 소멸하고 스올, 무덤, 음부, 지옥이 그들의 거처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면서 이러한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였다면 지옥으로 가기위한 회개입니다. 

15~20절입니다. “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16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7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회개라는 한 단어를 성경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시편 한편을 보았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회개하여 나의 현 상황을 세상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을 자랑을 위한 회개였다면 이것이 우리의 욕심에 의하여 마귀에서 미혹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회들이 이런 식의 회개를 전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여야 천국을 맞이하는데 천국을 배척하는 회개를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우리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다는 회개는 다 이런 식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그 십자가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면 그제야 회개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여 회개가 일어나면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의 행위를 일절 믿을 수가 없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됩니다.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회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임하시면 그런 자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죽어서 가는 좋은 장소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않았다면 죽어 천국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아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성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골로새서 1:13~14절입니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두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는 흑암의 권세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인간의 스스로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영광이 될 만한 것들도 가득 채워 놓았기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하여 신에게 정성을 바치는 곳입니다. 이런 곳이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권세에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건져내셔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십니다. 

이것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은혜로 받고 그 다음에 우리의 행함으로 이 세상에서 내가 행한 만큼 복도 받고 하늘의 상도 크게 받자고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을 때의 생각입니다.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어지는 15~23절입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이것이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4:18~20절입니다.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점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단번에 따라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자가 스승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제일 먼저 부르신 자가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입니다. 이들이 그물을 던지고 있는데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요한복음 1:35~42절입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자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한 제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한 제자는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나고서 자기 형제 베드로를 데려오면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고 하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헬라어이고 게바는 아람어입니다. 둘 다 바위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난 장소를 예루살렘의 요단강 근처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그냥 갈릴리로 내려와서 고기잡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다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처음 보는 분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고기 잡던 중인데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4:21~22절입니다.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고 나서 좀 더 가셔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아버지와 함께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나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따르는 것이나 참으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제자로 따라가려면 작별도 하고 집안 정리도 하고 따라 나서야 하는데 다 버려두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19절을 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천지가 창조됩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여전히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능력을 자신을 위하여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만 사용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그의 능력으로 사탄을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생명이며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러나 이미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기에 아무도 예수님을 빛과 생명으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ㄱ)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 세상의 신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태초에 캄캄한 혼돈만이 있을 때에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를 부르시는 것은 이러한 말씀의 능력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4:19절을 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기에 따라갈까 말까 하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물고기 잡은 어부를 사람을 낚은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오늘도 학교와 군대가 황금어장이라고 하면서 전도를 열심히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어부들은 고기를 잘 잡듯이 전도도 사람을 잘 낚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전도사를 할 때에 민락동 인애교회였습니다. 교인들 중에 어부들이 많았습니다. 직접 배를 가지고 연근해까지 나가서 고기를 잡는 분들이 세 가정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결 같이 사람을 사귀는 데는 재주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말보다는 손이 먼저는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오늘날 세련된 전도자의 모습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어부들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테크닉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을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3:47~50절입니다.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천국을 그물로 물고기 잡는 비유로 말씀합니다. 그물에 걸려오는 것들 중에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립니다. 요즈음 바다는 쓰레기가 더 많아서 버릴 것이 더 많습니다. 천국은 골라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 것은 이지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좋은 것과 못된 것을 어떻게 골라냅니까? 율법을 잘 지킨다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죄인으로 여김을 받던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이들이 그물에서 골라진 좋은 것입니다. 왜 좋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담기에 좋은 것들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의 능력자를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담기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만 자기 백성을 불러내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으로 이천년 전부터 그물질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는 자들 위에 계십니다. 세상의 영광을 받는 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연단하기 위한 여러 가지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17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집이란 교회입니다. 교회가 심판을 받는 것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서 이런 심판이 먼저 시작이 되었다면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의 제자로서 그물을 던지는 것도 거저 사람이 많이 모으기 위한 그물질이 아니라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골라내는 작업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다면 이야 말로 전하는 자의 능력도 아니도 듣는 자의 능력도 아닌 오직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 말씀의 능력을 날마다 맛보아 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