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18~22   나를 따라오라    2014. 9. 28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지난주에 17절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늘 우리가 주체가 되어 우리가 회개하여야 천국을 맞이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보았듯이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 회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십자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완성하시고 그 결과로 나온 하나님의 의를 자기 배성에게 선물로 부어주시면 그제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오늘은 제자를 부르시는 모습에서 말씀의 능력을 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부분적으로 그대로 옮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점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단번에 따라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자가 스승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제자가 되려고 나서는 자들도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시는 모습에서 말씀의 능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겠습니다. 

18~21절입니다.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제일먼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십니다. 이들이 어부라서 한참 그물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요한복음 1:35~42절입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자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한 제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다른 한 제자는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나고서 자기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려오면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시고 장차 게바라고 하리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난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그냥 갈릴리로 내려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고기 잡던 중인데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당장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오늘 말씀의 초점입니다. 

마태복음 4:21~22절입니다.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고 나서 좀 더 가셔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아버지와 함께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나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따르는 것이나 참으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제자로 따라가려면 작별도 하고 집안 정리도 하고 따라 나서야 하는데 다 버려두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4:19절을 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기서 ‘말씀하시되’가 중요합니다. 옛날에 교회에서 게임을 할 때에 ‘가라사대’ 게임이 있었습니다. ‘가라사대’라는 말을 하면 동작을 하고 ‘가라사대’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동작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 개역개정에서는 ‘가라사대’ 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바뀌었겠습니까? ‘말씀하시되’ 또는 ‘말씀하시기를’로 나옵니다. 그런데 전에 성경에서 가라사대가 무려 777번이나 나옵니다. 얼마나 많이 나왔으면 게임의 규칙으로 만들 정도였겠습니까! 그러므로 가라사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한글개역으로 ‘가라사대’ 가 처음 나오는 곳이 창세기 1:3절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가라사대가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마지막 가라사대는 요한계시록 22:20절입니다.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가라사대의 위력을 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천지 창조의 시작과 끝이 모두 ‘가라사대’ 즉 ‘말씀하시되’로 시작되고 마감이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봅니다.  

요한복음 1:1~5절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여전히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능력을 자신을 위하여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만 사용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그의 능력으로 사탄을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생명이며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러나 이미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기에 아무도 예수님을 빛과 생명으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ㄱ)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 세상의 신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태초에 캄캄한 혼돈만이 있을 때에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를 부르시는 것은 이러한 말씀의 능력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4:19절을 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기에 따라갈까 말까 하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물고기 잡은 어부를 사람을 낚은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오늘도 학교와 군대가 황금어장이라고 하면서 전도를 열심히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어부들은 고기를 잘 잡듯이 전도도 사람을 잘 낚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전도사를 할 때에 민락동 인애교회였습니다. 교인들 중에 어부들이 많았습니다. 직접 배를 가지고 연근해까지 나가서 고기를 잡는 분들이 세 가정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결 같이 사람을 사귀는 데는 재주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말보다는 손이 먼저는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오늘날 세련된 전도자의 모습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어부들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기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을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말씀하시되, 가라사대, 이런 단어가 앞서서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어떠함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하신 분이 부르시는데 어느 누가 따라 나서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께서 부르시는데 갈까 말까를 망설일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주님의 부르심에 가족과 작별하고 오겠다는 자들도 있고 거부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주님의 부르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57~62절입니다.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째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오는 자들을 예수님은 거절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뭐하려고 따라오려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경상노회 고시부장으로 있는데 이번에 목사 후보생이 2명이고 목사 고시가 7명입니다. 내일 이들이 고시를 할 때에 면접도 있습니다. 왜 신학을 하고 왜 목사가 되려는지 물어볼 것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는 그런 예수님을 따라나서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따라 나서려고 하는 자를 거부하십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가기는 하겠지만 아버지를 장사하도록 허락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 부분이 효도를 가르치는 동양사상에 맞지 않기에 여러 가지로 해석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서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이 죽은 자나 죽은 자를 장사하는 자가 다 죽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십자가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이미 죽은 세상입니다. 이런 바울을 세상이 보면 바울이 죽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이 볼 때에 어떤 사람으로 보입니까?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보입니까? 세상에 대하여 세상 사람보다 더 세상적인 것들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까? 이 두 번째 사람이 따라 나섰는지 아닌지 성경은 기록이 없습니다만 주님의 부르심이 이런 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셋째는 주님을 따르기는 하겠습니다만 가족을 작별하고 오겠다고 합니다. 죽은 아버지 또는 곧 죽을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가족 작별하는 것은 한 두 시간이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쟁기를 잡은 자가 뒤를 돌아본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런 부르심에 스스로 응답할 사람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르심에 이런 모양이 나온다면 이런 자는 주님의 능력이 없어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23~28절입니다.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상세한 내용은 이 본문을 볼 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선 자들이 무엇을 받을 것인지를 묻습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자기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따라 나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주겠느냐고 묻습니다. 자기들이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슨 보상을 하시겠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따라나섰다고 하는 것, 죽기까지 따라 가겠다고 하는 것들이 십자가 앞에서 몽땅 부정당합니다. 그래서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배반한 그 제자들을 주님은 십자가 이후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게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자기 백성을 불러내실 때에 반드시 십자가로 걸러내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완전히 부정당한 자들이 제자가 되고 백성이 되었을 때에 이들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약속하신 말씀의 능력임을 압니다. 

마태복음 13:47~50절입니다.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천국을 그물로 물고기 잡는 비유로 말씀합니다. 그물에 걸려오는 것들 중에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립니다. 요즈음 바다는 쓰레기가 더 많아서 버릴 것이 더 많습니다. 천국은 골라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 것은 이지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좋은 것과 못된 것을 어떻게 골라냅니까? 율법을 잘 지킨다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좋은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여김을 받던 세리와 창기들이 좋은 물고기였습니다. 이들이 그물에서 골라 담아진 좋은 물고기들입니다. 왜 좋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담기에 좋은 것들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의 능력자를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담기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만 자기 백성을 불러내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으로 이천년 전부터 그물질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이 말씀대로 고기 잡은 어부들을 사람을 낚는 제자로 만드신 것은 전적으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입고서도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 나섰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십자가 앞에서 부인되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여 다시 고기잡이나 하러간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을 주님께서 이루어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자들은 반드시 무엇을 증거 하게 됩니까? 나는 나를 부인하지 못하고 주님을 배반하고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말씀에 신실하시기에 결국 나를 주님을 따르도록 만들어 내시고야 마십니다. 이것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주의 성령이 임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기에 고난을 받습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내용이 아니기에 배척을 받습니다. 

베드로전서 2:4~10절입니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 자신도 건축자의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시기에 자기 백성은 반드시 이런 과정을 통하여 불러내십니다.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인지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에 보시면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의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자들은 반드시 자신이 어두임이었는데 이제 빛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빛 안에 들어왔기에 자신이 어두임임을 압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긍휼만을 전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1:12~17절입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나 바울이나 주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주의 긍휼만을 전합니다. 이런 자들이 오직 주의 긍휼을 입은 것은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그 주님께서 자기의 말씀을 친히 이루어내신 결과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이라는 그물을 던지는 것은 거저 사람을 많이 모으기 위한 그물질이 아니라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골라내는 작업입니다. 좋은 것이란 오직 주의 긍휼이 담기기에 좋은 세리와 창기와 죄인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긍휼 외에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다면 이야 말로 전하는 자의 능력도 아니고 듣는 자의 능력도 아닌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 그 주님께서 자기의 말씀을 이루어내신 결과입니다. 이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