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23~5:2   산상설교 서론      2014. 10. 19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 5,6,7장의 서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수훈이란 베풀어 가르친다는 말입니다. 요즈음은 잘 사용하지 않기에 산상설교라고 하였습니다. 우선 산상설교를 보는 여러 가지 시각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로 산상수훈을 윤리와 도덕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간디나 슈바이처 같은 사람을 들 수가 있습니다. 간디나 슈바이처가 산상설교의 내용을 윤리와 도덕으로 보고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여 지금도 세계의 위인전기에 수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은 이 설교를 하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개혁주의적인 관점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개신교라고 할 때에 가톨릭에서 개혁하였기에 개혁주의라고 합니다. 개혁주의 관점은 자연인은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도움으로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로이드 존스입니다. 그런데 본인도 이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을 알았기에 이런 표현을 하였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넘어질 수 있지만 넘어진 자리만큼 올라간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의 산상설교를 보면서 고등학교 때 배운 이은상의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는 그런 시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산상설교라는 고지를 정복하여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한 때는 산상설교를 로이드 존스 목사와 같은 입장에서 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주의 영향으로 훈련을 받았기에 청년 때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 산상설교정도는 다 외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서 암송을 해도 이 본문으로 암송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부지런해 노력을 했습니다. 전에 잠시 말씀을 드렸기에 구체적은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성경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기에 하라는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만약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다면 하나님이 잘못 된 것이라고 여기면서 이 말씀들을 실천해 보았습니다. 문자적으로 어느 정도로 실천할 수 있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 5:27~30절을 봅니다.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을 지킬 사람이 있습니까? 눈으로 얼마나 많은 범죄를 합니까? 견물생심(見物生心)입니다. 그런데 죄 짓는 눈이라고 눈을 빼고 손이 범죄 하였다고 찍어 내버리신 분이 있습니까? 

5:4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의 불가능함을 이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해 본 분들은 절감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실천해보려고 노력해보지도 않고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을 할 수 있느냐고 아예 시도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말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지 않은 분이라고 봅니다. 구제 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가 있습니까?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재물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노력할수록 절망감만 더하여진 말씀이 산상설교입니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 복음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루어내시는 일에 해당되는 되는 자들은 십자가라는 죽음의 길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입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원해서 갈 자가 없는 길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어 내심으로만 끌고 가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산상설교를 이루어내시고 자기 백성에게 전가시키십니다. 

오늘본문 4:23~24절은 두 번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면서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가 있는 분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야 참된 안식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파에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심으로 참된 안식이 무엇이며 안식의 주인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자 그림자인 안식일을 지킨다는 자들이 역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지킨다고 여긴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본문 25절과 5:1절을 보시면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이들은 병 고침을 보거나 소문을 듣고 따라 나온 무리들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십니다. 장절로 구별이 되어 끊어지는 느낌이 있지만 한 문맥으로 보셔야 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따르는 것을 보시고 일부러 산에 올라갑니다.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옵니다. 산에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이 나아왔다고 해서 이들이 12명의 제자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로 여겨지는 자들은 예수님 앞에 더 가까이 온 자들로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무리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8~29절입니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8절에서 무리들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무리들도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응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서기관들은 율법의 선생들입니다. 이들의 가르침이 어떠하였는지 봅니다. 

마태복음 23:1~13절입니다.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 본문을 볼 때에 다시 보겠습니다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비교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자들입니다.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아주 경건한 사람들인 것처럼 외식합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가르치는 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짐만 지우게 되는데 그 결론이 더 무서운 말씀입니다.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와 다르다고 합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마태복음 11:28~30절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신 지심을 알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하여 또 산상설교를 통하여 성도가 얻는 참된 안식입니다. 

마태복음 5:1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산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곳이며((4:8), 오늘 본문에서 설교하신 곳이며(5:1),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곳이며(17:1), 부활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신 곳입니다(28:16).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산이란 모세의 시내산과 대비되는 산입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1차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는 것은 모세의 자리에 앉으셨다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조금 전에 본 마태복음 23:2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처럼 말씀을 가르치기 위한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이 산이라는 단어를 70인 역에서 모세가 산에서 말씀을 받은 것과 같은 산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짐만 잔뜩 지우고서는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짐을 대신지심으로 그들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설교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를 통하여 예수님의 안식을 얻는 자가 성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산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산은 시내산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는 말씀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를 뿐 아니라 모세와도 다르십니다. 어느 정도로 다르십니까?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를 만드시고 그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3: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종이지만 예수님은 아들입니다. 이 아들을 믿는 자는 그의 집이 됩니다. 

히브리서 12:18~29절입니다.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ㄹ)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지난 수요일 저녁의 결론입니다. 모세가 이른 시내산은 아무도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짐승조차 접근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의 죄가 어떠한지 그러한 죄인들이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율법의 의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면 오히려 죽임을 당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기서 하늘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능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있는데 시온이라고도 하고 장자들의 총회라고도 하고 교회라도 합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3:1~18절입니다.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돌 판에 쓴 율법이든 산상설교이든 간에 모세의 수건이 가리고 있으면 죽이는 일이 됩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죽이는 정죄의 직분이 아니라 살리는 영의 직분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주의 영으로 됩니다. 주의 영이 임한 자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인 됨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더럽고 부정한 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심각한 질병을 문둥병으로 봅니다. 이 질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마을에서 격리됩니다. 당연히 성전에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문둥병자가 접촉하게 되는 모든 것이 다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를 통하여 우리의 부정함이 그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마태복음 8:1~4절입니다.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산상설교를 마치시고 내려오셔서 제일 먼저 치료하신 자가 나병환자입니다. 그 나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부정함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그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산상설교를 통하여 문둥병자처럼 완전히 부정한 자임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부정함을 대신 담당하시며 모든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자리가 십자가임을 알고 믿게 하십니다(갈3:13). 이것이 산상설교를 통하여 얻는 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