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3   심령이 가난한 자     2014. 10. 26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지난주에 산상설교 서론을 보았습니다. 산상설교의 일차 청중은 유대인들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산위에서 들은 자들도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의 배경에서 자라납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이 살아야 한다는 환경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는 세상입니다. 정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율법을 지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통하여 자신들의 죄가 어떠한지를 알게 되면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산상설교를 통하여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여기는 자신들이 문둥병자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 부정한 것들임을 알기에 오직 주의 긍휼만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란 사람이 지켜낼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지켜낼 수 있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에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십니다. 이 땅에서 누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있습니까? 아담의 타락 이후로 어떤 인간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없습니다. 선악과의 유혹은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그 어떤 인간도 마음이 스스로 가난해 질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 이러한 욕심이라는 것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의 뜻과 자기의 계획과 자기의 소유도 없는 사람입니다. 1퍼센트도 자기주장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가난한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산상설교를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시면서 예수님만이 산상설교를 실천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만이 산상설교를 실천하실 뿐만 아니라 그 실천하심으로 만들어내신 의를 자기 백성에게 넘겨주십니다. 그 의를 선물로 받은 자를 성령이 임하였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한 것은 곧 주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문자로 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으로 임하였기에 그 말씀이 주인이 되어서 그 사람을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십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종교적인 사람이나 자기 행위에 어느 정도라도 가치를 두는 사람들은 그만큼 싫어하겠지만 이런 종교성에 지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다 이루어내신다는 말씀에 아멘하며 좋아합니다,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다고 하면서 그동안 종교성으로 억눌려 놓았던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며 살아가는 것을 자유라고 여기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대부분 이러한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완성하셔서 자기 백성에게 넘겨주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이 복이 어떤 복인지 오늘부터 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흔히 팔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이라는 단어는 아홉 번 나옵니다. 아홉 번째 나오는 복이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말씀과 연결이 되기에 팔복이라도 해도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복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평소에 원하는 복과 전혀 다른 복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원하는 복이라는 것은 우리의 뼛속깊이 새겨진 세상의 복 개념입니다. 코카콜라 사장의 혈관에서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콜라가 흐른다는 말을 할 정도로 우리의 혈관과 뼛속에는 세상의 복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복의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보니 성경에도 복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원래 있던 복의 개념으로 성경의 복을 해석하여 자기를 위하여 사용합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의 말에서 평소에 복이 어떤 것입니까? 또 무언가 일이 잘 되었다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한국의 가장 강력한 종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학교입니다. 이것은 가히 종교의 수준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어느 대학에 합격했다고 하면 복 받았다고 잘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회사에 취직을 했다면 같은 말을 합니다. 물론 지나가는 인사말로 그렇게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과연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입니까? 오히려 대학에 떨어지고 취직이 안 됨으로 마음이 상해서 예수님을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나온다면 이것을 보고 우리는 복 받았다고 잘 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들을 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 보면 어순이 다릅니다. 헬라어 어순대로 봅니다. ‘복이 있다, 가난한 자들은, 그 영으로, 왜냐하면,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해지는 조건으로 복이 있어서 천국의 저희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이 임한 자가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자들이며 왜 이들이 복이 있는 자가 되는가 하면 천국이 저희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복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 곧 복을 받은 자들이란 그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심령이 어떤 것인지 구약에서 신약까지 가난하다는 단어를 다 훑어보았습니다. ‘가난’이라는 단어가 167회 나오는데 시간만 되면 이 단어가 있는 구절들마다 다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 무엇인지 대략적인 내용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출애굽기 22:21~27절입니다.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27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성경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가난한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그네 과부 고아 대표적인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학대하지 말고 잘 돌보라고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와 같인 학대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자비와 그 언약을 따라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여 내시고 약속의 땅에 넣으시면서 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너희가 어떠한 자였는지를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단지 구제사업 잘하여 복 받고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가 어떤 자였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늘 가난한 자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 가난함이란 너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그들에게 두시고 그들로 하여금 늘 주님을 의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통칭되는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경건한 자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에서 이들을 경건한 자로 연결하는 이유는 이들이 도움을 바랄 곳은 오직 주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33:16~20절입니다.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17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18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시편이 가난한 자가 경건한 자로 연결시키는 내용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말씀만 보아도 우리가 평소에 구하는 복이란 많은 힘입니다. 이런 힘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구하는 복은 하나님을 멀리하려고 하는 것들이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 언약과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구원하여 내십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여놓으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율법으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게 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여러 가지 율례와 규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은 절대로 땅을 사고 팔 수가 없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셨습니다. 살다가 어려워지면 경작권만 팔수 있지 땅 자체를 사고팔지는 못합니다. 형편이 되면 언제든지 물릴 수 있고 자신의 형편이 안 되면 친척이 물려줄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안 되면 희년에는 땅이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법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를 학대하면서 부동산 투기가 일어납니다. 

이사야 5:8절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가난한 자를 돌보아야 할 땅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며 가르쳐야 할 자들이 뇌물을 받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20절의 말씀을 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흑암을 광명으로 광명을 흑암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복을 저주로 저주를 복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이사야 6:1~7절입니다.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강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자기가 잘난 줄 알고 그렇게 된 줄 알고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해야 할 분향을 자기가 한다고 나섰다가 문둥병이 들어서 별궁에 거하게 된 왕입니다. 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사야가 보게 됩니다. 그 영광 앞에 자신이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입술이 부정한자라고 합니다. 문둥병자는 입술을 가리고 자기를 부정하다고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이 문둥병자임을 발견하는 것이 산상설교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이 문둥병자임을 발견하는 이 상태를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복이 있는 것은 이런 죄를 제단 숯불로 그 입술을 지져 그 악과 죄가 사하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이 바로 이런 가난한 심령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6:1~4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자가 누구입니까? 성전을 지어 바치고 소와 양을 잡아 드리는 자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어떤 자인지 느낌이 옵니까? 

이사야 61:1~3절입니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신다는 말씀이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게 된 자들이 바로 이사야이며 다윗과 같은 자들입니다.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압니다. 

시편 51:16~17절입니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사야 66장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자는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님께서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이 시편의 배경은 잘 아시는 대로 간음과 살인을 한 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나온 시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악 덩어리인데 모태 죄인임을 철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이나 다윗의 상한 심령이 다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시편 123편입니다.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안일하고 교만한 자들은 이 땅에 가난한 자들을 비웃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가난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의가 가득한 자들이 비웃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난하게 된 자들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는가 하면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바라보게 됩니다. 옛날에 가난한 소작농들은 주인의 집에서 잔치가 있으면 일해 주러 가야 합니다. 소작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보상 없이 주인의 집에 일을 해야 합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 혹 주인이 남은 음식이라도 한 보퉁이 싸주지 않을지 간절한 눈길로 그 손을 바라봅니다. 집에 굶주리고 있을 식구들 생각으로 혹시 조금이라도 주면 좋겠다는 그 간절한 심정이 가난한 심령입니다. 이런 심정으로 주님을 바라보십니까? 이런 마음으로 복음을 사모하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미 우리는 배부른 자들이 아닙니까? 복음도 들을 만큼 들었고 이제 먹고 살만큼 되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요한계시록 3:14~22절입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고 자신이 얼마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임을 알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자들이 복을 받은 자들이며 이런 자들은 주의 의만 사모하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며 이러한 자들이 이기는 자들이기에 천국이 이들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그 나라를 상속하게 하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약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