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4   애통하는 자의 복     2014. 11. 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지난주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스스로 심령이 가난해 져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자는 심령이 가난해 집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외치는 이사야와 모태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 다윗의 고백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힌 기적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라고 주님께 떠나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 마치고 처음 고침 받는 자가 문둥병자임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산상설교를 통하여 평소에 세상의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하여 전복(顚覆)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복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 다니는 종교인이지 거듭난 성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위에 것을 사모하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이 땅에서 땀을 흘려 일해야 먹고 삽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며 성경을 보고 성도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땅의 것만을 복으로 여기고 교회당에 와서 빌고 소원하는 것들이 땅의 것들뿐이라면 성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무나 분명한 말씀입니다. 한글을 읽을 줄 알면 다 알아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한글을 읽을 줄 몰라도 들을 수만 있어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 땅의 것들을 복이라고 말하면 그런 말에 아멘이라고 화답한다면 이것은 다 땅에 속한 자들입니다. 탐심이라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헌신 충성 봉사를 하였는데 그것이 땅의 것이든 하늘의 것이든 탐심으로 하였다면 우상숭배입니다. 이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오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자끄 엘륄의 ‘굴욕당한 말’이 번역되어 나왔는데 역자서문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어떻게 기독교 사회와 교회의 발달이, 우리가 성서를 통해 읽은 것, 곧 토라와 선지자와 예수와 바울의 분명한 텍스트와 모든 면에서 반대되는 사회, 문화, 문명을 탄생시켰는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이러한 기독교에 대해 기원 3세기부터 기독교가 국가와 결탁함으로써 복음적인 메시지를 완전히 와해시켰다고 간주한다. 이과 같이 기독교가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기술 문명과 정보화와 세계화로 인해 피폐된 사회와 세상을 고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오히려 기독교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순응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맹목적인 순응행위를 강요하면서 모순을 재생산해 내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의 한국교회 현실을 그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결탁해 버린 기독교는 이미 복음과 멀어진 것입니다. 국가를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으로 표현합니다. 짐승의 나라는 세상의 힘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별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세상의 멸망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땅에 어떻게 됩니까? 불에 타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린다고 하면서 왜 세상의 것을 그렇게도 탐하고 사십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산상설교를 통하여 봅시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원문의 순서대로 보면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들은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로 나옵니다. 애통해서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이 있는 자가 애통한다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정말로 마음으로 와 닿는 말씀입니까?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무슨 복이 있습니까? 부자가 되고 즐거움으로 가득해야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도대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이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시는데 이 복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도 당연히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산상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문둥병자로 드러남으로 통하여 심령이 가난하게 됨으로 애통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 애통하는 자들이 복을 받은 자들이지만 이렇게 되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이 산상설교를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그 성령을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실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엇을 슬퍼하셨는지 먼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32~37절입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내용이 있는 본문입니다. 나사라가 병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도 일부러 죽도록 내버려 두셨다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자기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의 날에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 안에 있다는 말씀을 못 알아듣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불러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경청하던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도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자기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고 하였는데도 예수님이 오지 않았음에 대한 원망이 들어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이 비통과 눈물이 어떤 내용입니까? 사람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셨는데 나사로가 죽었기에 슬퍼서 흘리는 눈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맹인을 눈 뜨게 한 사람이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느냐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눈물은 어떤 눈물입니까? 

죄와 사망에 갇혀 죽음에 종노릇하고 있는 자들이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울고 있는 모습이 슬픈 것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사랑을 받았던 마리아조차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임을 알지 못하고 죽음에 원망하는 모습을 보시고 애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심을 보이시기 위하여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십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라도 살아나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아난 나사로도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죽은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입니다. 안식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류 최대의 적이 사망입니다. 이 사망이 사람들에게 왕 노릇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애통입니다.  

히브리서 2:14~18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혈과 육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혈과 육에 속하였다는 말은 죽기를 무서워하여 한평생 매여 죽음에 종노릇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와 사망이 왕이 되어있는 상태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구원하시려면 예수님께서 자녀들과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지니시고 오셔야 합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며 죽음의 종노릇하는 자를 해방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오셨는데 그렇게 사랑받고 말씀을 경청하던 마리아도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이심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기를 무서워하여 한평생 종노릇하고 있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슬픔이며 비통함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애통하시는 분, 근원적인 애통을 하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그 애통은 애통으로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을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면 이제야 성도도 애통이 일어납니다. 무엇에 대한 애통인지는 죽음에 종노릇하였던 자신에 대한 애통과 역시 죽음에 종노릇하며 벌벌 떨고 있는 자들을 보면서 애통이 나올 것입니다. 이러한 애통을 하는 자들은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위로가 됩니다.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수요일 저녁에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함락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예레미야 당시에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 안에 여호와를 섬긴다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눈에 보이시는데 예루살렘 성안의 사람들은 성전을 자랑하고 성전의 제사로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곧 로마에 의하여 멸망할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데 제자들조차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예루살렘을 향하여 울고 계십니다. 평화에 관한 소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이시며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시며 참된 평화이신데 그 소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울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인들에게 온 우주의 멸망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다 무너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온 세상의 멸망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자랑하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붙어 살아갈 것처럼 살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탄식하며 울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진 것처럼 온 세상이 다 무너질 것인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무너질 세상의 것들에 목숨을 걸고 있다면 예수님이 애통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는 예수님의 애통이 어떠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애통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15:5절입니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예레미야 선자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벧전1:12). 그래서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처절한 눈물의 탄식입니다.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며 평안을 물을 자가 누구냐고 합니다. 이 예레미야의 그 질문을 성취하시는 분이 방금 본 누가복음 19장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애통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애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애통이 아니라 썩어질 것, 없어질 것,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소멸 될 것들이 없어서 애통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무엇에 슬퍼하였습니까? 무엇에 눈물을 흘렸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애통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시는 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애통과 예수님의 애통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애통한 선지자들의 애통이 무엇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예수님의 애통을 알게 됩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자신의 죄를 보면서 애통하고 교회를 보면서도 애통할 것입니다. 

에스겔 9:4~6절입니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예루살렘 성읍 가운데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시하라고 합니다. 그 표시가 없는 자는 다 죽이라고 합니다. 그 죽이는 일이 성전의 장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이란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우상숭배를 보면서 탄식하며 우는 자들이 누가 있습니까?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피에 대하여는 관심도 없이 거저 세상의 것들을 채워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보면서 탄식이 나옵니까? 아니면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열심히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하는데도 세상의 복을 주지 않는다는 그런 탄식이 나옵니까? 그러므로 주의 영을 부어주셔야 탄식이 나옵니다. 

스가랴 12:10절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1)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주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면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리라고 합니다. 그것도 장자인 독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애통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말씀합니다. 이러한 애통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셔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그 성령을 부어주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찔러 죽인 자임을 알고 자기 장자요 독자인 아들이 죽은 것처럼 애통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당신을 찔러 죽인 죄인이라는 애통이 있습니까? 

사도행전 2:36~41절입니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4)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찔림을 받아 어찌할꼬 하는 애통이 나오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이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참된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위로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복음을 듣고서도 애통함이 없이 이를 갈면서 돌로 쳐 죽여 버리는 일도 일어납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현장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현장에 있었던 바울에게 주의 영이 임하시니 바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바울사도가 무엇으로 애통하여 살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들에 대하여 애통하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참으로 애통하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7~10절입니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린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이런 탄식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애통하며 살게 됩니다. 무엇에 대한 애통입니까? 세상의 것이 없는 애통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탐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교회를 보면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되 위로입니다. 

야고보서 4:1~10절입니다.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1)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ㄱ)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간음하는 여인들이란 단지 여자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라고 이름 하는 자들이 십자가 지신 예수 신랑 버려두고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이 간음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슬퍼하여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우리의 웃음이 무엇에 대한 웃음이었습니까? 그 웃음들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을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친히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은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세상의 것들로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위로가 됩니다. 이러한 위로를 맛보며 사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