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6  의에 주린 자의 복  4. 11. 16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사람들은 모두가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목적이 결핍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강력하게 추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매슬로우 라는 사람은 다섯 단계로 표현합니다.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의 욕구, 존경받고 싶은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로 구분합니다. 생존하되 안전하게 생존하고 싶은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받고 인정도 받아 존경 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런 욕구들이 실현되면 자아의 실현으로 보고 그것을 만족 또는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 근원적인 결핍이 사라질까요?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근원적인 결핍은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입니다. 이미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생들은 그 생명나무에 스스로 나아갈 수 없기에 자기 힘으로 땅을 파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일이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이기에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온갖 창고를 만들고 통장을 만들고 부동산에 투자하여도 그 결핍을 채울 수가 없는 것은 그런 것들이 다 터진 웅덩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소출이 많아서 창고를 넓히고 그 창고에 가득 채우고서는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즐기자고 할 때의 모습이 터진 웅덩이에 채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 만족하는 자를 향하여 주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이 저축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자기에 대하여 부요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인색한 자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인색하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가 판 그 웅덩이를 의지하는 불쌍한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는 줄을 모르기에 그저 생존이 목적이 되어 있는 자가 어리석은 부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을 알 수 없기에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는 주리고 목말라 하지만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서는 결코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수 없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예레미야 13:23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인간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수 없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도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아서 그들이 만들어낸 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있기에 스스로 만들어낸 의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참된 의가 오시기까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의가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사야 64:6~8절입니다. “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입니다. 또한 땅의 티끌입니다. 그러므로 토기장이인 주님께서 다시 빚어달라고 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의 복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복으로 알게 됩니다.  

시편 103:13~18절입니다.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시편을 통하여 율법을 받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율법을 받은 인간들이 율법을 통하여 자신들이 죄인인줄 알고 주께 나아가서 주의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입은 의의 옷이라는 것은 더러운 누더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가 땅의 티끌임을 주께서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 의는 자손의 자손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 그 의가 영원합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의를 행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3:15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받는 물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 아래 오셨고 여자에게서 나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물에 빠져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립니다. 하나님의 모든 의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셨기에 부활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이루신 의를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시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의로 똘똘 뭉쳐져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의를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9:9~13절입니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1:31~32절입니다.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런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그들이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만들어 낸 의라는 것이 더러운 옷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전한 의의 도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의가 가득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믿지 않았지만 그들에 의하여 정죄당한 죄인들인 세리와 창녀는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의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의(義)라는 단어를 한문으로 풀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의(義)라는 글자는 나 아(我)자 위에 양 양(羊)자 있습니다. 여기서 나 아(我)자를 다시 파자(破字)하면 손 수(手)변에 창 과(戈)자입니다. 결국 나란 손에 창 들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생수의 근원에서 끊어진 인생들은 다들 손에 창을 들고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남을 무찔러야 합니다. 이런 자들의 후손들이 바로 가인의 후손들이며 이들이 도시 문명을 만들고 성을 쌓고 창과 칼과 각종 무기를 만들어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7배이지만 나를 죽이는 자는 벌이 77배라고 하는 라멕과 같은 자들이 다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생존만을 위한 자아가 아니라 자신이 착한 사람으로 의로운 자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결국 참된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배척한 자아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나에 의하여 찔려 죽으신 분이 바로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입니다. 그러므로 나로 인하여 죽임 당한 예수님께서 나의 위를 덮고 있어야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의를 내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없어서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심으로만 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의를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로 넘겨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7~11절입니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성령이 임하여 알게 되는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의를 따로 챙겨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에 대한 책망과 연결이 됩니다. 유일하게 의가 되시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셨으니 이 땅에서는 어떤 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낼 의가 없다는 책망을 성령으로 받게 되면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에게 임한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자가 주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로마서 1:16~17절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이 복음이라고 하는 그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어 세상에 잘되고 성공하는 것이 복음입니까?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하나님의 의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면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책망하고 오직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증거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쌓고 있습니다. 

로마서 2:4~5절입니다.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율법의 행위에 묶여 있는 자들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그들의 의를 쌓아간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모세가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셔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예수님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이것을 증거 하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무겁겠는지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 심판의 기준입니다. 

로마서 3:19~27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피임을 이렇게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로마서 10:1~4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과 완성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자기 의를 만들어내자는 자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4~17절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할 때에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나의 욕망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나의 욕망이란 자아의 실현을 위하여 창조주를 창으로 찔러 죽인 자들입니다. 이런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욕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몸을 주님께서 완전히 멸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이 역사 속에 살려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나를 위하여 사는 것들이 무너지고 그리스도가 나를 주장하여 나를 해체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십니다. 이미 묵시 속에 완료된 일을 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람을 세상의 판단과 가치관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18~21절입니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입니다. 아담 이후로 다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 하는 일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위에 예수님이 온전히 덮여져 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배부르게 됩니다. 

누가복음 1:53절입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마리아가 천사의 수태 고지를 받고서 성령으로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메시아가 하실 일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합니다.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부자 청년이 무엇으로 부자였습니까?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자기 의에 대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는 말씀에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가 없는 세리와 창기들은 그 좋은 것으로 배불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것이 좋은 것이며 이것은 또한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여야 의가 없어서 주리고 목말라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됨으로 배부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6:33~37절입니다.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누구만 올 수 있습니까?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자만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떤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내신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7:9~17절입니다.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의 결론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자신의 의가 더러운 누더기임을 알기에 오직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찬송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찬송합니다. 결코 구원이 자기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