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7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2014. 11. 23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합니다. 공부를 마친 자녀들에게는 취업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합니다. 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라고 합니까? 이 험한 경쟁의 세상에서 대충 살면 인생이 뒤처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되기에 열심히 하라고 닦달을 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기 위하여 이렇게 애를 쓰고 살아가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복을 말씀합니다. 이런 복을 받고 싶으신가요? 도망가고 싶으신가요?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복의 개념을 가지고 그런 복 받기 위하여 교회로 오신 사람들을 다 내어 쫓는 복이 바로 산상설교의 복입니다. 교회 와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서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복을 원하십니까? 

그동안의 복을 다시 요약해 봅니다. 첫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 복은 자기 자신에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어떠한 자격도 없는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라는 것은 지성이며 감천이라는 원리입니다. 내가 지극한 정성을 바치면 하늘도 감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감동시키자는 말도 하고 하늘의 보좌도 움직이자고 합니다. 열심을 내고 금식을 하고 통성으로 부르짖으면 들어준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행위들이 다 자기를 위한 것이기에 우상숭배라는 말씀을 지난 수요일 저녁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시고 그 영을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시면 비로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알기에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면서 주의 긍휼이 참된 복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이런 복이란 기존의 복이라는 것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모든 자들을 전복시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만 보면 내가 긍휼을 베푸는 조건을 채워야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복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긍휼을 베푸는 것이며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 왜 복인지 알게 되고 그런 긍휼을 받은 자는 자신도 타인도 긍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긍휼이 어떤 것인지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43:13~14절입니다.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여기서 네 아우는 베냐민이고 그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노예로 팔았습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간첩으로 보겠다는 말에 양식이 떨어졌는데도 애굽으로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 야곱이 그 사랑하던 라헬의 두 아들 중에 요셉은 이미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남은 그 베냐민마저 포기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 곧 요셉이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 은혜가 바로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낮아졌는지 아시겠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 요셉을 죽이려 하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그 죄를 들추어내시기 위하여 이런 환경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흉년이 들고 애굽에는 곡식이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입니다만 그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그 언약 백성들의 죄가 무엇인지 다 드러내십니다. 자기들이 죽여 버리려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가 은 20을 받고 노예로 팔아버린 그 사람에게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구합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자식을 잃으면 잃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졌습니까? 이런 때에 긍휼이 베풀어집니다. 

창세기 43:29~30절입니다.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요셉이 형들과 동생 베냐민을 만난 자리입니다. 29절의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긍휼이라는 단어는 바로 30절의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요셉을 그들을 긍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를 죽였지만 그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받는 자들은 오직 주의 긍휼만 바라보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만 긍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긍휼로 볼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긍휼을 베풀어준 조건으로 긍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의 긍휼을 받았기에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하여서도 보여줍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 잘 때에 함은 그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어주지 않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뒷걸음으로 아버지의 침상에 들어가 그 벌거벗었음을 가려주었습니다. 나중에 노아가 이 사실을 알고 함을 저주합니다.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라고 합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서 왜 아들을 저주하느냐고 하는 분이 계신다면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윤리 도덕 교과서로 보기에 그렇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시는 것입니까?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에 홍수로 진멸당하여야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입게 하셔서 방주를 예비하게 하시고 그 방주로 덮어주셨기에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함은 그 덮어주심의 은혜를 벌써 잊어먹고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이미 진멸당하여야 마땅한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주신 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가 없다면 우리가 마땅히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33:17~19절입니다. “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 말씀의 배경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진멸하신다고 합니다. 이때 모세가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여기서 다 죽이시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느냐며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진멸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함께 가지는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다시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올려 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차라리 여기서 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같이 가겠다고 하시면서 그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달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 이름으로 담아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시는데 그 이름이 깁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3:14절에서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물어 보았을 때에는 “나는 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로 스스로 있는 자 곧 자존자라는 번역을 합니다만 이 이름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는 ~이다”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말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70인 역입니다. 70인 역에서 출애굽기 3:14절의 “나는 나다”를 “에고 에이미”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은 은혜 베풀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누구 마음대로입니까? 오직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조건이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앞에서 본 노아홍수의 이야기나 요셉의 형제들의 이야기나 모세의 이야기에서 모든 인간은 진멸 받아 마땅한 죄인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로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통하여 보여줍니다. 이렇게 긍휼을 입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그 땅에 펼쳐내며 살라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은 간데없고 애굽과 가나안 문화를 따라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 체제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나온 자들이 긍휼을 베풀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이런 나라는 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긍휼이 없는 나라는 하나님의 원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긍휼을 바탕으로 하기에 이들을 진멸하시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풀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대로 긍휼이 시행될까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고리대금으로 동족을 종으로 삼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때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회개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느헤미야 9:30~31절입니다. “30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느헤미야 9장 전체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내용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조상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선지자들을 보내어도 그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지만 주의 크신 긍휼로 아주 멸하지 아니하신 것은 모세에게 선포하신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포로에도 돌아온 자들이 스스로 경성하여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율법을 열심히 지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율법을 지키는 그 일들이 오히려 주의 긍휼을 배척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할 자들이 자신들의 의를 세우고자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열심히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롬10:2~3).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복들은 다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산상수훈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이 다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불쌍히 여김으로만 구원을 받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러한 구원을 교묘하게 배척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을 인간의 행위로 막는 것이 바로 마귀의 작전입니다. 

마태복음 9:9~13절입니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지금까지 구약의 모든 말씀은 이 말씀으로 다 해석이 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긍휼이지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제사란 사람이 제물을 들고 신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왜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을까요? 긍휼을 알라고 제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의 죄로 인하여 누가 너 대신에 누가 희생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라고 제사를 말씀하셨는데 그 제사를 하는 것을 마치 자기의 의로운 행위가 되는 것처럼 대체를 한 것입니다. 

호세아 6:1~7절입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11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늘 한결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애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의 인애가 어떻습니까? 아침 구름 같고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습니다. 인애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긍휼과도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애인데 그런 인애가 다 사라지고 도둑들만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데 그 이유는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애 즉 긍휼이 없어서 심판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심판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긍휼을 원하시는데 그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는 자신이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을 불쌍히 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불쌍히 여깁니다. 돈이 없어서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이런 저런 조건이 없어서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으려고 온갖 종교적인 행위들로 자기를 치장하는 자들이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은 자 만이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9:11~18절입니다.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지금까지의 긍휼에 대한 요약적인 해석입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선악의 행위에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죄악 가운데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배속에서 이미 형의 발꿈치를 잡은 사기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반박이 일어나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선악과를 따 먹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선악의 주체가 자기가 되어 선악의 행위로 자신을 판단하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율법을 지켜서 흠이 없다고 여긴 바리새인들의 모습이며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바울이 이러한 자신의 의라는 것이 얼마나 예수님을 배척한 것인지 알고 오직 주의 긍휼만 바라보게 됩니다.   

로마서 11:30~32절입니다.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는 자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대인들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통하여 이방인이 긍휼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긍휼의 사건을 통하여 유대인들도 긍휼을 베풀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긍휼로만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긍휼을 베푸신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긍휼을 입은 자는 긍휼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외적인 조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8~13절입니다.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긍휼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창세기에서 로마서까지 본 내용은 자신이 긍휼을 입어야만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하여 정말 나는 긍휼이 아니면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자기 인식이 된다면 이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긍휼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로 대하게 됩니다. 이런 긍휼이 없는 자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긍휼만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만약 자기의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야고보서 2:10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긍휼만이 심판을 이깁니다. 

시편 85:10절입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긍휼과 진리, 의와 화평은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불쌍하다고 봐주면 진리가 진리 되지 못합니다. 화평하게 하려고 의를 희생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긍휼과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자리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대로 공의대로 심판을 하시면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설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불의를 조금도 용납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 의로우신 심판이 십자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안에서만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고 그 긍휼을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긍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은 측은지심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긍휼이 없으면 아무리 남을 불쌍하게 여겨 자기 재산을 다 바치고 자기의 목숨마저 버릴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긍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나타난 이 긍휼이 우리에게도 임하여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