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8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2014. 11. 30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동화입니다. 옷을 좋아하는 임금에게 두 재단사가 나타나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옷감으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지을 수가 있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데 재단사들이 못을 박아두기를 이 옷감은 ‘구제불능의 멍청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감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많은 돈을 주고 옷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옷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신하를 보내니 신하의 눈에 재단사들이 옷을 만드는 흉내만 내고 있는데 옷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옷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자신이 구제 불능의 멍청이가 되기에 잘 만들어지고 있다고 임금에게 보고합니다. 어떤 번역은 마음이 착한 사람에게만 보인다고 합니다. 결국 임금도 구제불능의 멍청이가 되기 싫어서 또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 옷을 입고 거리 행진에 나섰는데 어떤 꼬마가 임금이 벌거벗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복을 받은 사람은 마음이 청결하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기에 나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인다고 하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동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구제불능의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하여 또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임금님의 옷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보인다고 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모였습니까? 산상수훈의 복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최고의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여러 가지 봉사와 수고를 하는데 그 결과로 얻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이 말씀에 감격과 감동이 있습니까? 내가 수고하고 애를 쓴 만큼 시간과 물질을 바친 만큼 하늘에서 나의 상이 많아지고 내가 살 집의 평수가 넓고 화려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이 복이라는 이 말씀에 정말 아멘이 되시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복들이 다 뒤집어 져야 한다는 말씀을 계속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3:8~10절입니다.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뵙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를 뱀의 유혹을 받아 따먹고 난 뒤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어지는 22~24절입니다.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냅니다. 그 이유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체계로서는 결코 생명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인간은 생명이 되지도 못할 흙만 파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땅의 티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참으로 복이며 성공이라고 합니까? 이 세상에 그런 말 하는 자들이 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이 땅에 교회라는 간판은 무수히 걸어놓고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그런 곳에서 무엇을 복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잘 섬겨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받아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곳이 바알의 신전이 되었다고 종종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는 어떤 것을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을 복으로 여기십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위하여, 그것이 목적이 되어 이렇게 모였습니까? 

출애굽기 33:18~23절입니다.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에서 본 말씀입니다만 오늘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에 하나님을 그 영광을 다 보여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영광을 보여주시면 죄인은 죽을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이름에 담아서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름만 선포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20절에서 보시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여호와께서 손으로 덮으시고 지나가신 후에 등만 보이시고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모세조차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게 됩니다. 

민수기 6:22~27절입니다.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구약의 제사장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비추어 주시는 것이며 그 얼굴을 자기 백성에게 향하셔서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인 줄 아는 사람은 먼저 죄인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다 죽게 된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면 이것이 심판이 됩니다. 

신명기 31:16~18절입니다. “16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18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할 것을 이미 알고 율법을 노래로 만들어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언약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게 되면 벌을 받을 것인데 그 벌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하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는 까닭이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굴을 숨기셨기에 일어나는 일이며 얼굴을 숨기신 것은 그들이 언약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복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로 인한 것임을 지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은 단지 세상에서 통용되는 마음이 착하다 양심이 곱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마음들은 세상의 윤리나 도덕이나 어떤 종교라도 다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라고 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고도 하고 심지어 마음수련 하는 단체들도 있습니다. 철학자들도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담 이후로 마음이 부패하였기에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스스로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 4:23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생명의 근원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우리가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마음을 지키고 청소하여 청결하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의 인생들이기에 어느 누구도 생명으로 나아갈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렘17:9).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 마음을 청결히 하여 성경이 말하는 지복(至福)인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4:1~6절입니다. “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한 선지자입니다. 천지 만물이 다 주의 것임을 고백한 후에 여호와의 산 구약으로 말하면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을 말합니다. 그 거룩한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이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그런 자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이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가 여호와의 복을 받는데 그 복이란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받은 자는 여호와를 찾으며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풀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이어지는 7~10절입니다.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영원한 문이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영원한 문은 영광의 왕만이 들어가십니다. 그 영광의 왕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마3:16). 아무에게도 열리지 않던 하늘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들이 받는 물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실 때에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영원한 문이 열리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만이 하늘의 사닥다리가 됩니다. 

요한복음 1:47~51절입니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면서 나사렛 예수를 소개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말을 합니다. 이때 빌립이 일단 와보라고 해서 예수님께 데리고 가니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어떻게 저를 아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합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간사한 것이 없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기다린 것입니다. 간사하다는 말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 마음을 품고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메시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메시아가 오면 자기들이 받을 혜택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이 청결하지 않은 더러운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은 어떻게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메시아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주여 이제야 평안히 놓아주신다고 한 시므온이나 안나와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이 됩니다. 이들이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얼굴 뵙는 것 그 한 가지 소원만 있던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다나엘과 같은 자들이 받을 복이 무엇인가 하면 야곱의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한 것처럼 인자가 되신 예수님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리라는 것을 본다고 하십니다. 곧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시편 24:5~6편의 말씀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일어남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복을 받은 자들은 마음을 시편 42:1~5절에서 다시 봅니다.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러한 자들이 받은 그 복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요한복음 1:14~18절입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10절입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처소를 마련하려고 가신다는 처소란 곧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런 복을 받은 자들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