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9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2014. 12. 7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 하나도 이루어 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모든 말씀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산상수훈에서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이루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제가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 있는 상태로 이 말씀을 보면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을 하게 됩니까?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화평하게 하여 복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복이 좀 추상적이고 현세의 복과는 괴리가 있지만 그래도 복이라고 하니 내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서 이런 복도 받아 보려고 나서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사람이 근본이 된 상태로 이 말씀에 접근하게 되면 사람이 이루어낼 수 있는 평화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 내용들 중의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유엔의 평화 유지군에 대하여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정의는 이렇습니다.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유엔의 군사 활동’ 이것이 얼마나 모순된 말입니까?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평화유지군이 있어야 되는 세상입니다. 어느 정도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지 군대의 힘으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지만 과연 이 평화유지군이 세상의 평화를 항구적으로 가져올 수 있습니까? 강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평화유지군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평화라는 것이 이렇게 부실합니다. 

또 종교적인 평화에 관한 이야기는 성 프란시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알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탁발수도승이 되어 평화와 사랑을 실천한 자로 성자의 지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의 기도문이라고 알려진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여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참 감동적이지만 성자가 된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평화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만 이러한 평화는 인간 사이의 평화를 말합니다. 그런데 평화유지군이 있어도, 이러한 성자가 있어도, 여전히 세상은 요란한 싸움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내 안에서 평화가 없습니다. 내 속이 날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지 않습니까? 길을 다니거나 운전을 하다보면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살벌합니다. 어느 누구든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표정들입니다. 각자의 손에 창 들고 다니는 자아들의 군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만은 평화와 안식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와 평안과 안식이라는 것이 과연 하늘에 속한 것입니까? 땅에 속한 것입니까? 

평화에 관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MBC PD를 했던 김재환 감독이 ‘트루맛 쇼’와 ‘MB의 추억’을 다큐영화로 만든 사람입니다. 세 번째가 ‘쿼바디스’인데 12월 10일 개봉하려고 하자 대형교회의 압박으로 대관 취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감독의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문제가 있는 걸 모두 알고 있는데, 절대 고쳐지지 않을 거라는 아주 이상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요. 고치려고 하지도 않고 다들 가만히 있음으로 유지되는 '이상한' 평화가 있죠. 결국 그 평화는 상식적인 시선에서는 아주 조롱받을 수밖에 없는 평화예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그런 평화로움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죠.” 이러한 사람에게 지지를 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도 요한 계시록의 말씀대로 거룩한 자는 계속 거룩하고 더러운 자는 계속 더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계22:11). 그러면 도대체 성경이 말씀하는 화평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4:1~4절입니다.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에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평화와 안식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싸움과 다툼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기에 하나님과의 화평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아무리 지상낙원을 만들어도 그곳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쏟아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로 태어났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신이 그렇게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었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그런데 방금 본 말씀은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로 모여서 세상과 벗되기를 구하였다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평화의 왕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9:1~7절입니다.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평강의 왕을 말씀하시는데 왜 평강의 왕이 오시는가 하면 자기 백성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흑암의 땅에서 무겁게 멘 멍에와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러한 자들을 구원하셔서 참된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평강의 왕이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 왕이 다윗 언약을 따라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인데 그 보좌는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보존할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입니다. 사람의 열심이 아닌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내신다고 합니다. 

이사야 54:8~10절입니다. “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9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10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진노하셨으나 영원한 자비로 긍휼히 여기시는 이유는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에스겔 37:25~28절입니다. “25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7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결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 있는 때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와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께서 잠시 진노하셔서 얼굴을 가리셨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따라 영원한 왕위를 세워주신다고 합니다. 다윗의 영원한 왕위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눅1:3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평의 언약을 세우시고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 되시며 자기의 피로 백성을 사서 하나님의 처소를 만들어내신다는 하나님의 자기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 때가 되어 드디어 평강의 왕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평강의 왕을 배척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이 원하는 평강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그들이 원하는 평안은 나의 평안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른 염려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그런 화평을 원한 것입니다. 지금 화평, 평안, 평강, 안식을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언제나 내가 만족하는 그런 평안을 담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에 이러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참된 화평은 하나님과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화평이라는 것으로는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 될 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에도 결코 화평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요약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은 유대인들이 행한 일이 이웃을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율법을 알고 지키는 자기들만이 옳다고 여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없고 이웃과소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복음의 지식으로 이웃을 마음대로 판단하면서 정죄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화평을 전하는 예수님은 불화의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로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 사랑의 확대는 가족입니다. 더 확대해도 더 큰 단체가 될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가족이나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런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배척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누가 이 길을 갑니까? 자기 목숨을 살릴 뿐 아니라 더욱 확대하여 영원히 살고 싶은 자들이 어떻게 이 길을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셔서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심으로만 이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8~23절입니다.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 내십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의 성취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기에 그 피의 혜택을 입은 이자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샀다고 합니다(행20:28). 그 피로 화목하게 된 자들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십자가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자들의 모임이기에 이들은 서로 화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란 오직 한 가지 십자가의 피로 화평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다른 부수적인 것들로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취미와 취향이 같다거나 혈연 인연 학연 같은 것으로 화목한다면 그것은 취미활동 클럽에 불과합니다. 교회란 오직 십자가의 피로서만 화평하고 화목 하는 곳입니다. 

에베소서 2:11~22절입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된 것도 십자가의 피로 화평하게 하시고 사람과 사람 사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원수된 것도 십자가의 피로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산 자들이 하나님의 처소가 됩니다. 이제부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 역사 속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자아들이 다 무너져 내려야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체성, 자존심, 자아라는 것들이 이 역사 속에서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을 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자들이 함께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가기 위하여 내가 깎여지고 다듬어져서 점도 흠도 티도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드시기 위하여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천사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온갖 죄인들이 다 모인 곳입니다. 교회에서 손 빼고 뒷짐 지고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함께 구정물에 손을 담그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서만 화목하게 되는지 배우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17~21절입니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그 복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여서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이 복을 받은 자들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이 화목은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불화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피로 화목하게 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로마서 5:8~11절입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죄인으로 있을 때에 우리에게 물어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로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혜택을 받는 자들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입니다. 십자가로 화목이 된 자들은 그의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합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나 이웃이나 교인이나 간에 무슨 일로 싸우고 아직도 감정이 골이 남아있다면 그 사람을 만나기가 아주 껄끄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오해가 풀리고 서로 진정한 용서가 되었다면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즐거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회복은 영원한 멸망에서의 구원입니다.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은혜로 인하여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과 다 불화하여도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잘못해서 불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불화라면 의로 인하여 핍박과 환난을 당하는 것이 복이라는 산상수훈의 마지막 복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화평이란 사람이 추구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다 이루시고 자기 백성에게 넘겨주셔야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9~23절입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로 언약을 다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강이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 평강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고 기뻐하는 자들에게 다시 평강이 있으라고 하시면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마치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듯이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하면 죄가 무엇인지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평강이며 화평이며 평화이며 화목이며 안식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