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3   너희는 소금이다.     2014. 12. 21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교인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알만큼 아주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주 잘 알려진 말씀이지만 이보다 더 많이 오해하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들어온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은 세상의 썩어짐을 방지하고 세상을 맛을 내게 하여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해 왔습니다. 그래서 좀 더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해 왔습니다. 그러면 천 만 명이 넘는다는 기독교인들이 있는 이 대한민국이 과연 살만하고 밝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오히려 기독교가 없던 시대보다 더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이 아닙니까? 대부분 소금과 빛 또는 빛과 소금으로 13절에서 16절까지 함께 보지만 저는 오늘 소금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13절을 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합니다. 소금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너희는 소금이라고 주님께서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으로 세상의 소금이 되자고 하는 말은 이미 틀린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소금도 맛을 읽게 되면 버려진다고 하니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 살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식으로 성경을 봅니다. 이렇게 구원중심으로 보면 안 됩니다. 

금요일 어느 분의 문자가 왔습니다. 고전 9:27, 계 2:5절이 구원의 취소가능성을 의미하는지 질문했습니다. 고전 9:27절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하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말씀과 계시록 2:5절은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구원의 취소 가능성에 대한 질문 자체가 인간의 구원욕구를 내포한 질문입니다. 즉 이런 질문 자체가 욕망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에 이런 본문을 통하여 나의 구원이나 취소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나 버림은 오직 만유의 주가 되시는 주님의 손에만 있구나 하는 식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일차 청중은 산위에 나아와 말씀을 들은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팔복의 말씀을 들은 자들입니다. 팔복의 말씀은 우리가 그동안 보았습니다만 인간이 추구하는 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따라 택하신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복입니다. 물론 이 복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이 복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복을 완성하시고 그 복을 자기 백성에게 성령으로 부어주시면 제자들도 이러한 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복을 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핍박의 복을 받은 자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통용되는 소금의 용도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소금은 맛을 냅니다. 그 맛이란 짠 맛인데 이 맛을 소금이 잃을 수가 있습니까? 소금은 아무리 오래 두어도 그 맛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해석하느라고 사해의 어떤 불순물이 섞인 소금은 그 화학적인 분해현상으로 소금도 맛을 잃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주석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가 맛을 잃으면 버림을 받아 발에 밟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아니라도 수많은 종교의 경전이나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운 바른생활과 도덕 교과서는 세상에 서 소금과 빛으로 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패를 척결하고 청렴결백하게 살자고 합니다. 이렇게 살면 몇 몇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을지 모르지만 온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다들 뇌물을 받는데 혼자 받지 않음으로 조직에서 잘려지면 세상이 칭찬을 할 것입니다. 혹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혼자서라도 나는 그렇게 부패한 자들과 다르다는 자기만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은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그래서 팔복의 마지막 복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과 연결이 되는 말씀이 소금과 빛에서 계속하여 이어지는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산상수훈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고 그 이루심을 자기 백성에게 적용을 시키십니다. 이러한 적용을 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억나고 이해되게 하시면서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로 가게 됩니다. 이 길은 우리가 스스로 가고 싶어 하는 길이 결코 아니라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이미 팔복에서 보았습니다만 그런 복을 누가 원할 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윤리 도덕적인 삶에 또 하나의 착하고 바르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복음을 알면 착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전에 어떤 예를 말씀드리면서 여자가 화장하는 것이 죄냐고 물었을 때에 어떤 사람이 그것은 예의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은 예의입니다. 이러한 예의가 없어서 무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얼마나 증오가 쌓였으면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착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기적이라는 말이나 자기 밖에 모른다거나 세상 사람보다 더 세속적이라는 그런 말을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다가 욕을 얻어먹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핍박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엉터리 같은 핍박에 대한 말씀을 먼저 봅니다. 

베드로전서 4:14~16절입니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두 가지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살인, 도둑질, 악행,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고난이 아니라 개고생입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됨으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을 싫어하는 핍박과 고난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착하게 살아서 칭찬을 받는 것과 전혀 다른 핍박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세상과 너무나 대조되기에 그렇습니다. 

우선 세상의 소금 역할을 좀 봅니다. 제가 보는 소금은 살아있는 것을 죽여서 변하지 않게 합니다. 김장할 때에 배추를 소금에 절입니다. 그러면 싱싱하던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서 축 늘어집니다. 그리고 썩지 않게 합니다. 각종 염장식품들도 소금으로 만듭니다. 살아있는 야채들을 소금으로 죽여서 변하지 않게 만듭니다. 어려서 형을 따라 미꾸라지를 많이 잡았습니다. 미꾸라지를 잡아오면 어머니께서 대 소쿠리에 담아서 굵은 왕소금을 한 주먹 뿌립니다. 그러면 미꾸라지가 죽는다고 버둥거리며 저희들끼리 비비면서 때가 벗겨지고 죽게 됩니다. 그러면 푹 삶아서 뼈를 추려내고 추어탕을 끓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이런 굵은 왕 소금 같은 말씀의 소금이  뿌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때가 벗겨지고 살았다고 하는 것들이 죽어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성경에서 소금의 용례를 봅니다. 창세기 19:26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성경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소금 이야기입니다. 롯의 아내가 불에 타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불에 태워질 그 성을 돌아보았다고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해바닷가에 소금기둥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 형태와 비슷한 것을 롯의 아내라고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돌아보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에 비추어 보시기바랍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지 불태워질 세상을 보는지 말입니다. 

신명기 29:21~26절입니다. “21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의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22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의 자손과 멀리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 24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25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언약을 갱신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면 언약의 저주를 받아서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된다고 합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것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돌아본 것인데 이 말씀에서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소금이 사용되는 용례를 이러한 심판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세상에 심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서 교육과 환경과 경제와 정치와 종교를 말할 때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면 그 사람은 소금을 확 뿌리는 역할을 한 것이기에 사람들에게 당연히 핍박을 받습니다. 이러한 심판의 내용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의 내용을 소금이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0:34~35절입니다. “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여호와 앞에 분향하는 향에 소금을 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성결하게 한다고 합니다. 소금이 왜 성결하게 하는 것이냐 하면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기에 그렇습니다. 소금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소금 그대로의 성분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으로 보여줍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냅니다. 

레위기 2:11~13절입니다. “11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제(素祭)란 곡식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에 누룩이나 꿀을 넣지 못하게 합니다. 발효가 되는 것은 그 성분이 변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제물에 소금을 넣어야 하는데 이 소금을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소제물에  소금을 넣어면서 언약의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민수기 18:19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거제(擧祭)는 제물을 들어 올리는 제사입니다. 이 거제물은 제사장의 몫으로 영구히 제사장의 몫으로 준다고 하시면서 이는 영원한 소금 언약이라고 합니다. 소금 언약이라는 말 자체가 변하지 않는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금과 언약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성경에 나오는 소금의 역할에 대하여 정리해 봅니다. 소금이란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언약에는 반드시 두 가지 요소가 함께 나옵니다. 즉 심판과 구원입니다. 롯의 처나 신명기 29장의 언약을 배반하면 언약의 저주가 바로 소금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소제물과 거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합니다. 소금은 변함이 없는 것을 말하지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그 제사에 소금이 들어감으로 인하여 제사를 통하여 변함없는 속죄를 언약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곡식이나 짐승의 제사는 그림자입니다. 온전한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에는 심판과 구원의 기능이 동시에 있다는 말씀이며 이 언약이 변함이 없다는 것이 바로 소금 언약이라는 말씀입니다. 

역대하 13:4~5절입니다. “4 아비야가 에브라임 산 중 스마라임 산 위에 서서 이르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무리들아 다 들으라 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이 말씀의 배경은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고 남 유다는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80만의 대군으로 남 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남 유다는 40만의 군대로 방어를 합니다. 이 때 아비야가 북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소금 언약을 이야기 합니다. 그 소금 언약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스라엘 나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는 언약을 하셨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러나 북이 공격을 할 때에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북 이스라엘은 50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여호와의 소금 언약이 어떠함으로 또 계시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16:4절입니다.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이 어떠한 상태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꺼림을 받아 버려진 계집아이였습니다. 배꼽 줄도 자르지 않고 물로 씻지도 소금을 뿌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소금을 뿌려 정하게 하는 일도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의 긍휼로 자신의 신부로 세웠더니 한 짓이라고는 바람피우는 일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버려야 하시는데 하나님은 이들을 용서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스겔 16:60~63절입니다.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세우신 언약이 변함없기에 네 언약이 아니라 내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나 간에 늘 언약을 배반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으로 자기 백성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소금 언약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합니다. 오직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신 그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성전 동쪽 문에서 나오는 생명수를 마시는 자들입니다. 이 생명수가 무엇입니까?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이 임하는 것이 그 배에서 생수가 강같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수를 마시지 못하면 그것이 말라 죽는 소금밭이 됩니다(겔47:11).

마가복음 9:47~50절입니다.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지옥이 어떤 곳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로 꺼지지 않는 곳이라서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소금이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소금을 너희 속에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금을 너희 속에 두라고 합니다. 소금을 너희 속에 두라고 하시면서 서로 화목하라고 합니다. 서로 화목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토요일 부산에서 어떤 분이 전화가 와서 자신은 이미 거의 다 죽었는데 한 2프로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이 소금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는 중에 전화가 왔기에 그래서 굵은 왕 소금으로 확 뿌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화목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연말에 어떻게 하든지 내년에는 아무 것도 안하고 조용하게 숨고 싶은 마음을 여러분의 봉사 지원서를 보면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소금을 쳐져서 죽지 않으면 영원한 쉼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란 대단한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고 하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은 예수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요6:29) 하나님의 영광입니다(빌2:11). 그러면 우리를 왜 교회로 불러 모으신 것입니까? 교회의 직분은 무엇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까? 

에베소서 4:11~12절입니다.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려면 나의 몸이 살아있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소금을 두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묵시 속에서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실제로 죽이십니다. 이렇게 죽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이 일어났기에 성도 간에도 서로 화목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부름을 받은 자라면 지금 여기서 소금으로 침을 당하는 것입니다. 쓰리고 따갑고 도망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간다고 도망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으로 침을 당하시기 바랍니다. 이 역사 속에서 주님은 자기의 백성을 반드시 소금 언약으로 만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시는 방법은 우리를 죽이시고 변함없도록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금 언약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백성이 된 자들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들과 반드시 불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시는 말씀은 이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이 얼마나 지옥 같은 곳인지를 알고 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게 되는 자들이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버려져서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이 버려짐이란 세상에서 욕을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욕을 많이 얻어먹는다고 세상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일을 많이 하려고 애를 씁니다. 구제를 한다든지 사회봉사를 한다고 합니다. 형편이 되면 그런 일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결코 세상의 소금 역할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소금 역할이란 이 세상을 영원한 불로서 소금 치듯 할 날이 올 것이라고 전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소금입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는 세상이나 종교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4:3~6절입니다.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5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전도란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십자가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인에 대하여는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복음이 없는 사람들과의 영혼 없는 공허한 대화들의 시간들을 아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소금을 두어 화목하게 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이들의 말이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썩어진 것과 썩어질 것들에 대하여 말하는데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낡아지지 아니할 것을 말하는 자가 소금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