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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2014. 6. 8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지난주는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와 마태복음의 연결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대한 서론으로 보려고 합니다. 우선은 마태복음의 배경을 먼저 보겠습니다. 지난주는 아주 넓게 말라기에서 마태복음까지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좁혀서 마태복음의 기록 당시를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의 임하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증거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 되도록 하시겠다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행1:8).


그런데 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이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흩어져야 하는데 성령이 임하여도 이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은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을 허락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어난 일이 스데반 집사의 순교이며 이로 인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흩어지면서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도들도 본격적으로 흩어진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흩어집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때는 AD.70년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여 잠시 독립이 있기도 하였지만 곧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다윗과 같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기다렸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기다린 이유는 자신들의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는 자기반성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운동들로 인하여 바리새파가 등장합니다. 자신을 모든 더러움에서 분리하여 거룩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자는 운동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가장 앞장서서 핍박한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로 분리가 됩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복음에 대하여 회개하고 믿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들로 나누어집니다. 핍박 하는 자들은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성전제사를 드리면서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여전히 성전에 나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날 때부터 다리에 장애를 가진 자를 고쳐줍니다. 사도들이 아직 성전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전이 무너져야 합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임하여 자신들이 성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성전을 떠나지 못합니다. 이미 용도 폐기된 건물에 메여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성전의 파괴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37~39절입니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과 제자들마저 그 성전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1~5절입니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루살렘 성전에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등극할 날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는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는 길인 줄 알고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기 위하여 올라가십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예루살렘의 성전이 건재합니다. 이러한 성전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대한 반역이 주후 66년에 일어납니다. 이 반역을 진압하기 위하여 로마에서 베스파시안과 그의 아들 티투스가 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포위하여 굶겨죽이는 작전을 사용합니다. 이러던 와중에 베스파시안은 로마의 황제가 되어 돌아가고 그의 아들 티투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가 됩니다. 마지막 까지 저항하던 자들은 맛사다 요새라는 곳에서 피하여 가서는 이방인에게 죽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하여 자결로 마무리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상세하게 나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으로 로마에 투항하였기에 유대인들에게 욕을 얻어먹지만 이 당시의 역사와 유대 고대사를 상세하게 기록함으로 역사가의 명예를 얻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배경을 간단하게나마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마태복음의 최초 수신자들이 유대인들 중심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목숨처럼 지키는 자들이며 그들의 성전에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다윗시대와 같은 나라가 되어 주변을 정복하고 조공을 받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기대하며 잠시 따라다녔던 예수는 저주 받아 죽는 죽음인 나무에 달려 죽어버렸습니다. 로마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빨리 도망가라는 것이 마태복음 24장의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소계시록이라고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마태도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에게 빨리 피하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너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마태복음 24장의 내용은 그 당시의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파괴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멸망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결코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미국의 9.11사태 이후에 카터콜론 목사가 피하라고 하는 외침을 들으셨지요! 번영, 부, 성공을 말하는 그런 교회에서 도망치라는 고함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의 최초 수신자나 약 2천년이 지난 우리나 간에 복음을 듣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피난하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교회로부터 피난하여야 합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는 교회와 목사로부터 피하여야 합니다. 어디로 피난하여야 합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피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입니다. 지금 제가 메시아와 그리스도를 같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처음 듣는 분이 계실 겁니다. 메시아란 히브리말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부음 받아 구별되게 하는 자들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뜻이 메시아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가 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기독(基督)입니다. 한문의 뜻을 빌려온 것이 아니라 음만 빌려와서 표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뜻이 기독교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이 자손이란 지난주에 잠시 살펴본 대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씨와 땅을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시는데 그 언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기 생명을 걸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언약 체결을 구경만 했습니다. 그래서 일방적인 은혜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이름과 생명을 건 언약의 혜택을 받는 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입니다. 이러한 씨의 예표는 이삭이며 땅을 차지한 왕의 예표는 다윗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두 언약만이 아니라 모든 구약의 약속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과 다윗을 언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계보란 헬라어로 ‘비블리오tm 게네세오스(Bi,bloj gene,sewj)’입니다. 히브리어로 하면 ‘세페르 톨레도트’입니다. ‘비블리오스’ 나 ‘세페르’는 책을 말합니다. '게네세오스'나 '톨레도트'는 족보를 말합니다. 그런데 게네세오스는 영어식 발음으로 ‘제네시스’입니다. 이 말은 많이 사용합니다. 창세기를 영어로 ‘제네시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제네시스라는 말은 기원, 태초, 족보, 혈통, 탄생 등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아담의 죽고 죽는 족보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인하여 낳고 낳고의 족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피하여 들어갈 유일한 곳은 마태복음의 최초 수신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이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간 자들의 대표적이 모습이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린 혈과 육의 나라가 아닌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은혜이며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침 뱉고 고개를 돌이질 하면서 돌아서는 그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는 자들은 결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뻐할만한 것들을 전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 이 땅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로 나오지만 과연 그들이 원하는 바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만 한 것들이라면 다른 예수를 전하고 다른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전하는 것은 죽고 죽는 아담의 족보를 마감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의 계보에 편입되는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계보에 들어선 자들은 자신의 혈과 육이 단절되고 자신의 야망이 단절되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들이 다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이러한 길을 선택하여 올 자가 없습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살펴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편입된 사람들의 모습들은 한 결 같이 철저한 죄인들이 오직 은혜로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편입 된 자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고 다윗이 왕이지만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자들이 생명의 계보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8:56~59절입니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들의 아비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요8:44).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은혜이며 이러한 믿음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한 일입니다(벧전1:12).


마태복음 22:41~46절입니다.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ㅁ)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께서 시편 110편을 말씀하시면서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아무도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기쁨이며 다윗의 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태어난 대한민국도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입니다. 거금을 주고 족보를 사서 신분세탁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선시대에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에 어떤 평민이 자신의 재산을 희사하여 백성을 구휼하였으면 임금이 그 사람에게 양반의 족보를 하사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돈과 권력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담의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십니까? 아담의 모든 족보는 결국 죽었더라는 것이 족보의 결론입니다.


창세기 5:1~8절입니다.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첫 사람 아담부터 죽었더라는 계보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낳았더라! 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로마서 5:12~22절입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아담의 계보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대비하여 보여줍니다. 아담의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자가 죽는 것처럼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19~22절입니다.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로마서 5장이나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들이 다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만이 생명의 계보입니다. 이러한 계보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혈과 육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한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예전 것이 지나갔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족보인 혈과 육의 족보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내신 족보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의 삶의 자세는 예수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그 약속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