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다운받기]

마태복음 1:1~6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2014. 6. 15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시작한 마태복음의 내용은 우선 족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14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볼 내용은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기까지 14대이며 그 다음은 바벨론 포로에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14대입니다. 그런데 14대라고 하지만 이 안에는 생략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에서는 13대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왜 족보를 생략하면서까지 14대로 구분한 것입니까?


여러 가지 이론들이 많지만 그 중에 한 가지만 소개하면 다윗의 이름을 히브리어의 숫자로 바꾸면 14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지만 유대인들은 다윗을 중심으로 족보를 소개하기 위하여 14대로 나누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 구분은 아브라함부터 다윗이 왕이 되는 14대와 다윗의 왕위가 이어지는 14대와 왕위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돌아오는 기간을 14대로 보려고 한 이유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왕임을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계보에 온갖 수치스러운 일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태어난 대한민국도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민족입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자기 가문의 영광을 위한 족보이기에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없애버리거나 어쩔 수 없이 기록해야 한다면 아주 적게 기록하거나 미화합니다. 가문의 수치를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은 집안에서 단속합니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죽이기도 하고 형제들이 누이를 죽이기도 하면서 가문의 영광을 위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는 것은 자기 혈통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혈연중심을 보여줍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 중에 ‘경남기독신문’과 ‘크리스천 경남’신문에 어느 집안 광고가 나왔습니다. 제목이 이렇습니다. ‘경주이씨 국당공파 74대 이명출(유음전)후손 선교 114주년 기념대회’입니다. 114년 전에 호주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은 사람의 후손이 100% 온전한 믿음의 가정이 되었다는 것과 114년 7대 동안 450명의 후손 중에 목사 30여명 장로 30여명 권사 40여명을 비롯해 많은 인재가 배출 된 것과 6.26때 순교자가 나온 것 등을 감사의 제목으로 광고하였습니다. 이중에 사위와 며느리로 온 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말하는 신앙의 명문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자랑스러운 모양입니다. 저도 경주이씨 국당공파인데 저의 집안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어떠한지를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의 족보들은 자기들의 영광스러운 면들을 부각시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오늘날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 같은 내용들이 그대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로 태어난 후손이 들어있습니다. 기생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간음하고 임신이 되자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충성스러운 우리야를 왕의 밀령으로 살해합니다. 이러한 족보들이 그대로 기록된 것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입니다. 이런 족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시는 것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약속하신 그 사랑을 베푸시기 위하여 오신 언약의 계보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이해하는 가문의 영광을 위한 족보가 아니라 죄인들의 가문에 오셔서 그 죄인들을 속량하시기 위한 족보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인도 예수님은 구원하신다는 구속의 족보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희생이 어떤 것인지도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족보처럼 혈과 육의 자랑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혈과 육으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가 없는 하나님의 가족을 어떻게 만들어 내시는지를 보여주시는 약속의 족보입니다.


마태복음 1:2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미 창세기에서 상세하기 보았습니다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 씨에 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나서 낳은 자녀가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힘과 능력으로 낳은 아들이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혈과 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나야 하기에 이러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 후에 다시 약속의 자녀를 주시는데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하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태어나는 자가 이삭입니다.


로마서 4:16~17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혈과 육으로 낳은 이스마엘이 아닌 약속으로 태어난 이삭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것도 죽은 자와 방불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 또한 모리아 산에서 희생제물이 되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없는데서 있게 되었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결론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어지는 18~25절을 봅니다.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사건이 로마서 4장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로 연결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삭이 없는데서 나왔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은 모형이며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씨가 아닙니다. 없는데서 오신 분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씨가 되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의 계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시는 약속의 계보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와 쌍둥이입니다. 에서가 장자인데 장자의 이름은 이 족보에는 없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족보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되는 것이 마태복음의 족보입니다.


로마서 9:7~18절입니다.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아브라함과 이삭의 족보에 대하여 로마서의 두 곳을 통하여 무엇을 위한 족보인지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람의 원함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입니다.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았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장남인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을 더럽힘으로 장자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요셉이 장자의 몫을 차지하여 요셉의 두 아들이 두 지파가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유다 지파로 인하여 나옵니다. 유다는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자신의 생명을 걸겠다고 야곱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갔을 때에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나섭니다. 이러한 희생의 모습이 바로 장자의 역할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유다의 결혼과 자녀와 며느리의 관계에 대하여 봅니다.


창세기 38:1~30절입니다. “봉독”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와 세라가 유다의 족보를 이어갑니다. 이것은 이방 여인 다말이 자기의 목숨을 걸고 유다의 씨를 이어가려고 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어떤 경로로 오는지를 보여줍니다. 유다가 한 때는 자기의 희생을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자기의 혈육의 씨가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며느리에게 자기 자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낀 자기 핏줄인 셀라의 계통으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 여인이지만 대를 잇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걸고 유다의 씨를 이어간 이런 다말에게서 그리스도를 계보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다말에게 한 말이 네가 나보다 옳다고 합니다. 다말의 행위가 자기보다 옳다고 한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핏줄을 지키려고 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족보는 그런 인간의 핏줄이 아니라 누가 진정으로 희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3~6절입니다.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여기서는 라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속에 ‘누구에게서’라고 나오는 여인들이 다섯 명입니다. 방금 본 다말에게서, 이제 볼 라합과 룻에게서 입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와 마리아에게서 입니다. 다른 족보들은 그냥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런 식인데 특히 여자를 거론하면서는 누구에게서 라고 언급을 합니다. 이러한 여인들의 특징이 마리아 외에는 다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천하 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그 내용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복이란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입니다. 이러한 족보의 사람들이 다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 믿음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어떠한 죄인들도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라합을 봅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온 것을 숨겨주고 도피시킵니다.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애굽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과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넌 소문을 듣고 전부 두려워하면서 이스라엘의 진군을 막기 위하여 긴장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고 도피시키는 일은 역시 자기의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또한 자기민족을 배신합니다. 이런 라합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갑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히브리서 11:31절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주어진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런 은혜의 선물이 주어지면 기생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편입이 됩니다. 조국을 배신한 행위가 믿음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인본주의로 설명이 가능합니까? 이것이 어떻게 윤리와 도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까? 야고보서는 기생 라합의 이 행위를 믿음의 행위라고 합니다. 믿음의 행위라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른다는 이 행함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윤리도적적인 그런 행함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결코 믿음의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로 인하여 믿음이 선물로 주어져야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옳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룻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편입이 된 것 역시 다말과 라합과 같은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여인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나오미와 그 남편과 두 아들이 모압으로 이민을 갑니다. 그곳에서 두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남편도 죽었고 두 아들도 죽어버립니다. 세 과부만 남았을 때에 베들레헴을 하나님께서 돌보셨다는 소문을 듣고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때 두 며느리가 함께 가려고 하자 나오미는 말립니다. 너희 친정으로 가서 재혼하여 살라고 합니다. 자신은 늙었고 아이를 가질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때에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갑니다. 심판 하시는 하나님의 대한 소식을 듣고서도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죽음 외에는 어머니와 나를 떼어놓지 못한다고 하면서 따라 간 여인이 룻입니다. 도대체 이런 이방인에게 이런 믿음이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여인들의 희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연결되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살리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에서 족보를 따지는 것은 자기 가문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다 자기가 높아질 것을 생각하면서 따라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섬김을 받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누구에게서’에 해당되는 다말, 기생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는 다 자기 희생을 보여주는 계보입니다. 이들이 보여주고자 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일을 하실지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보여준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편입이 된 자라면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자리까지 섬겨주셔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혈과 육으로는 결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면 믿게 됩니다.


요한복음 1:12~13절입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혈과 육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하나님께로 난 자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입니다.


고린도전서 15:5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아무리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하여도 그런 것은 결국 혈과 육입니다. 썩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썩지 아니할 유업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족보에 편입이 되는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임한 사람이라면 더 이상 자기 이름과 자기 가문의 영광에 마음 둘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여 가십니다. 그렇게 불려 나온 자들은 혈과 육으로 나온 어떤 것도 신뢰할 수가 없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