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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25 임마누엘 2014. 7. 6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지난주에 이 본문으로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제목으로 전하면서 임마누엘에 대하여는 말씀드릴 시간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왜 그리스도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고 또 임마누엘이라고 하는지 한 번 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의 뜻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어디에서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죄에서 구원받기보다 나의 삶의 형편이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자기의 환경에 따라 메시아사상이 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하기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4:4~5절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오셨습니다.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는 것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얼마나 쉽게 떠나는지 봅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의 이 복음이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복음인지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기뻐한 자들도 다른 복음이 오면 얼른 다른 복음을 받아 챙깁니다. 그 이유는 복음 안에는 사람을 기쁘게 할 요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로 약하고 악한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 외에는 구원하실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얼마나 사람의 자존심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바울 자신도 이런 복음이 싫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보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율법적인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인 죄가 됨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는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데 이러한 심판과 구원의 의미를 임마누엘에서 담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에 대한 설교는 15년 전에 이사야 설교를 할 때에 한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7장과 8장을 통하여 왜 임마누엘이 심판이 되는지를 말씀드렸는데 아직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설교한 내용을 다시 요약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면 되는데 다시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하는지 이사야서 본문을 통하여 봅니다.


이사야 7:1~9절입니다. “봉독” 남쪽 유다의 왕은 아하스입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입니다. 열왕기서와 역대서에 이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하스만 잠시 살펴보자면, 아하스는 악한 왕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국제 사회의 흐름 속에서 강대국을 의지하여 자기 왕권을 지키려고 한 왕입니다. 전적으로 여호와만 의지하라는 이사야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의 원조를 요청하였고 앗수르 왕이 다메섹을 점령하였을 때 그곳에 가서 우상의 단과 구조와 제도를 보고 와서는 이것을 예루살렘에도 세운 왕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이방인의 신이 더 힘이 있어 보이니 그들의 섬기는 제단을 본받아 세운 그런 왕입니다.


이러한 아하스 왕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나라가 연합하여 남쪽 유다를 침공합니다. 침공의 이유는 앗수르가 신흥 강대국으로 등장하자 여기에 위협을 느끼게 된 아람 왕과 북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남쪽 유다를 공격하여 친 앗수르 정책을 펴고 있는 아하스 왕을 폐위 시키고, 반 앗수르 정책을 펼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으로 삼기 위하여 공격하여 왔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은 베가이고, 아람 왕은 르신입니다. 이들이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니 유다의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나뭇잎이 바르르 떨리듯이 떨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왕을 만나게 합니다. 왕을 만나는데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서 만나라는 것입니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남은 자만이 돌아오게 될 것을 보이시면서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르르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가만히 좀 있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었기에 이렇게 떨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윗의 왕가를 이어간다면 다윗이 의지한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입니다. 벌벌 떨고 있는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연합하여도 그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부지깽이는 불이 잘 붙도록 장작을 뒤적여 주는 막대기입니다. 그런 막대기가 나뭇가지이기에 불을 넣다보면 부지깽이 끝에 불이 붙습니다. 그러나 이 불은 너무나 약하여 약간만 흔들어도 꺼집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연합한 세력이 부지깽이 끝의 불도 아니며 그 불이 꺼져서 연기만 나는 그런 세력이기에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65년 안에 이 나라들이 망하리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도무지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약속을 믿지 못하겠거든 믿을 만한 표적을 구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표적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면서 거절합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모습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구원을 준단 말인가 라고 아하스는 생각한 것입니다. 적군이 이미 쳐들어 왔는데 하나님의 약속만 믿으면 된다는 그 말을 못 믿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르신과 베가의 침공에 대비하여 자기 나름대로 준비해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 나라보다 더 강한 앗수르에 원병을 청하여 놓았습니다.


이러한 아하스 왕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불신의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합니다. 그 징조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약한 여자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처녀에게서 나온 아이가 태어남으로 적을 물리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의 일차적인 성취는 두 나라가 망한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더 궁극적인 목표는 마태복음 1장 23절의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결국 메시아의 탄생으로 임마누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임마누엘의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임마누엘 그러면 우리는 좋게만 생각하는데 오늘 말씀에 보면 심판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심판을 통하여 스알야숩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본문을 보시면 아하스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앗수르의 군대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었던 앗수르가 오히려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역대하 28:1-8, 16-27절을 보시면 아람 왕과 북 이스라엘에 의하여 엄청난 전쟁의 참화를 겪고도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에 원조를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성전문은 닫아 버리고 아람의 신들이 그 나라를 도와서 강하여 졌으니 여호와를 버리고 그들의 신을 섬겨서 힘을 얻어 보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나라를 벌하기 위하여 앗수르를 하나님께서 몽둥이로 사용하십니다.


이사야 7:17절에 앗수르 왕이 와서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유다 백성들을 괴롭힙니다. 앗수르가 쏘는 벌이 되고 삭도가 되어 너희를 괴롭게 하리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유다 땅은 황무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황무하여 지는가 하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통하여 연명하는 것이면 그 땅의 남은 자는 겨우 먹고 사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포도원이 질려와 형극, 가시밭이 되어서 들짐승이 거하고 사냥꾼이 사냥하는 곳으로 폐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불신앙의 유다를 심판하시고 그 심판의 기능을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행하시는데 그 심판 후에 남은 자가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사야 10:20-23절입니다.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돌아오는데 어떤 특징을 안고 돌아옵니까?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이 구원인줄 알았는데 이제 그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였으니 이제야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오직 남은 자만 돌아옵니다. 이것을 땅 끝까지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에서 주께서 임마누엘의 사건을 통하여 심판하시고 그 심판에서 남겨진 자만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남겨진 자들의 특징이 임마누엘의 심판을 통하여 여호와만 의지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러한 언약의 성취가 마태복음에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임마누엘을 통하여 알아야 합니다. 글자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발을 벗고 엎드립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만났는데 죽지 않았다고 제단을 쌓고 샬롬 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는데 죽지 않은 것이 평강이라는 말입니다. 삼손의 아버지도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기에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약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죄인이기에 나를 떠나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서는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시려면 반드시 심판이 먼저 일어납니다.


이사야 8:1~15절을 봅니다. “봉독” 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말을 큰 서판에 통용문자로 쓰라고 합니다. 그 뜻은 ‘노략이 속히 온다’는 말입니다. 노략이 온다는 사실을 제사장 우리야와 예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서 증인으로 세웁니다. 유다 백성들이 심판받아 마땅하기에 임마누엘 하심으로 심판하셔서 남은 자를 남기시겠다는 것이 말헬살랄하스바를 통한 스알야숩입니다.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만 남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자기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짓게 하십니다. 이 아이가 아빠, 엄마라 하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를 침공하려고 온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수도가 다메섹과 사마리아입니다. 이 두 나라가 앗수르에 침략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략이 속히 오리라는 것은 앗수르가 북쪽으로부터 점령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점령이 다메섹과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유다까지도 덮쳐오는 것입니다.


5-8절에서 유다 백성의 죄가 고발됩니다. 그 죄란 유다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였다는 것은 자신들의 힘보다 두 나라의 연합한 그 힘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버리는 것입니다. 실로아는 예루살렘에 유일하게 솟아나는 물로서 조그맣게 흐르는 식수원입니다. 실로아 물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은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유다의 힘을, 실로아 물처럼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상태가 이런 것입니다. 자기들을 도와준다는 하나님의 능력은 간 곳 없고 연합군과 주변 강대국들의 힘은 강해져 가니 자기들도 힘을 원하는 것입니다. 힘을 원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하수 앗수르를 불러 오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세력을 유프라테스 강으로 비유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가 앗수르에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앗수르 왕이 구원을 베풀 줄 알았는데 구원은커녕 오히려 유다를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이들의 세력이 유다 온 땅을 덮고 그 물이 유다의 목에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유다의 멸망 가운데 그의 펴는 날개가 유다 땅에 편만한 것입니다. 그 심판의 힘은 목에까지 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만하심은 온 땅을 다 덮고 있는데도 유다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만 남기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인 우리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합니까? 더 나아가 한국교회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합니까?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싫어하고, 거대하게 몰려가는 세상의 강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대로, 세상의 판단에 좌우하지 말고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모습, 세상이 성공 지향적으로 갈지라도 교회는 미련하고 거리끼는 모습으로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왜 세워 놓았습니까? 그것이 기독교의 심벌이라고 세웠겠지요. 그러면 십자가는 죽음의 표지입니다. 그것도 비참한 저주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세운 곳에 모여든다는 것은 나도 그렇게 죽는 사람입니다 하고 오는 것이지요. 이것 이 아니라면 우리는 십자가를 내리고 그 위에 황금송아지를 걸어 놓고 모여야 할 것입니다.


11-1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이사야에게 알게 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라고 합니다. 백성들이란 절대다수가 행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리에 바로 서지 못하면 항상 다수 속에서 안전을 찾으려고 합니다. OX 게임을 할 때에 자신이 없으면 어디에 섭니까? 다수 속에 섭니다. 그런 길로 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수가 가는 길로 가지 않으려면 과연 내가 가는 이 길이 과연 바른가 하면서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길은 좁은 문일 뿐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둘째, 맹약한 자가 있다 하여도 그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맹약한 자가 있기에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라는 그들의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군사 동맹을 맺었기에 한국의 안보는 걱정 없다는 그런 약속을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은 믿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것을 믿지 않습니다.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원전 기술이 좋으니 수출도 한다는 그런 말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울산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진도가 3.5였습니다. 또 지난 주간에 중국의 주석과 부인이 왔습니다. 이러한 나라들과 맹약한다고 이 나라가 안전하겠습니까? 세상의 힘을 믿는 자는 불신자들입니다.


셋째,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는 것으로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두려워하고 놀라는 것으로 함께 두려워하고 함께 놀라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두려워하고 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쟁의 위협과 자기 보존의 두려움,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런 것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1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주께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헬살랄하스바스’ 침략이 속히 임하리라는 경고 속에서 세상의 두려워하는 것으로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놀라는 것으로 놀라지 아니하는 그런 자가 임마누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임마누엘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14-15절입니다. 말헬살랄하스바스를 통하여 스알야숩을 하시는 임마누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됩니다.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심으로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임마누엘의 약속을 무시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걸림돌이 됩니다. 비록 교회에 나왔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 것을 구하고 찾는다면 그런 자들에게 임마누엘은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를 때에 주님이 나의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나의 꿈을 깨어버립니다. 날마다 나의 의를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9:27~33절입니다.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ㅈ)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ㅌ)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ㅋ)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ㅈ.사10:22, ㅌ.사1:9, ㅋ.사28:16)


임마누엘이란 스알야숩과 말헬살랄하스를 배경으로 주어진 이름입니다. 노략이 속하여짐으로 남은자만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임마누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부딪힐 돌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것이 바로 자기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러면 나는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두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노략을 당하게 되면 오직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