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12~17   말씀을 이루려 하심    2014. 9. 14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ㅁ)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글자를 적고 책으로 만들고 우리가 읽는 것은 사람의 일로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성경을 보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보면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은 하지만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하게 됩니다. 성경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계시로 알려주신 내용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하여 알려주신 것은 우리보고 이 말씀대로 지켜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에 당장 반발이 나올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하라는 말씀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를 보고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질문합니다. 어느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신 내용이 있습니까? 정말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신 내용이 있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는지 율법을 통하여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실 분이 오실 것인데 그 분이 바로 메시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 위하여 부지런히 성경을 보고 읽고 외우며 실천하는 그들을 향하여 이 성경이 곧 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5:39).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모든 성경의 약속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내신다는 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성경을 통하여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베드로후서 1:16~21절입니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사도들은 친히 보고 들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특히 변화산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하늘로서 소리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에 대한 말씀은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을 보고 들었지만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록된 이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우리의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샛별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그리스도가 증거가 되지 않으면 성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풀게 됩니다. 성경의 예언이란 개인의 장래 신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성경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지 않으면 사사로이 풀게 됩니다. 사사로이 푼다는 것은 자신의 사적인 욕구를 채우는 방식으로 나가게 됩니다. 성경이 그런 내용이 결코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고 합니다. 요한이 왜 잡힌 것입니까?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증언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다 이렇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한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회개와 천국이란 바로 자기 뒤에 오실 그분을 맞이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믿지 않으면 심판입니다.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심판과 구원을 베푸실 이가 오셨기에 거침없이 회개를 선포합니다. 

마태복음 14:1~12절입니다. “1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6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내용과 죽임 당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이 예언한 그리스도가 오셨기에 이제 세례요한은 거침이 없이 회개를 선포합니다. 이로 인하여 감옥에 갇힙니다. 이 내용은 본문을 볼 때에 자세히 보겠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옥에 갇힌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롯을 보고서도 거침없이 회개를 요청한 것은 구원과 심판이 지금 집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에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감옥에서 맥없이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 값에 목이 잘립니다. 이 내용을 영화로 만든 장면을 보면 헤롯이 음탕한 눈길로 자기의 의붓딸을 봅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정명석에 빠진 어떤 아가씨가 세례요한이 쓸데없이 헤롯의 잘못을 고발하다가 감옥에 갇혀 죽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교주의 잘못을 공격하게 하지 못한 사전 포석으로 들립니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만 성경을 사사로이 풀게 되면 이런 교주가 나오게 되고 그런 교주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 12절을 봅니다. 세례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셨다면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12절을 보시면 마치 갈릴리로 피하여 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고 합니다. 방금 보았던 마태복음 14장도 예수님께서 요한의 죽음을 들으시고 피하여 가시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세례 요한은 담대하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고 감옥에서 죽어 가는데 정작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물러가십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13~14절을 봅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보면 가장 북쪽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지역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아주 멸시받는 동네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이 이유가 있습니다만 이 갈릴리로 물러가셨는데 예수님께서 자라신 곳 나사렛에 가십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나사렛에서도 떠납니다. 그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십니다. 이 지역이 다 갈릴리에 속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물러가셔서 활동하신 그 장소들조차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심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례요한의 투옥 소식을 듣고 피하여 가신 것처럼 보이는데 이렇게 하신 것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감옥에 갇혀서 죽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를 증거 한 세례요한 앞에 헤롯왕도 벌벌 떨면서 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천국의 복음을 전한 세례 요한이 한 계집아이의 춤 값에 팔려 목이 베어져 죽었습니다.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 그 아이가 들고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구약 성경을 받아서 지킨다는 유대 땅의 왕과 제사장들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됩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려고 오신 분을 증거 한 자가 이런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례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하고 증거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저 보다 크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천국에서 크고 작음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으로 그의 피 뿌림을 받아 성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례요한은 그림자로만 보았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지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짐을 마태는 아주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구약의인용이 60여회 나옵니다. 기록되었으되 하는 말씀들과 오늘 살펴볼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직접 인용 외에 간접인용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구약성경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임한 모든 사도들이 구약의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이 임하게 되면 신약과 구약 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의 눈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게 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말씀을 이루려하심이라는 내용만 마태복음에서만 열 번에 걸쳐 나옵니다. 오늘 본문까지 나온 내용만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마태복음 1:21~23절입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ㄱ)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ㄱ)은 이사야 7:14절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둘째, 2:15절입니다.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ㄴ)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ㄴ)은 호세아서 11:1절입니다. 

셋째, 2:21~23절입니다.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ㄹ)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ㄹ)은 이사야 11:17절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4~16절입니다.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ㅁ)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세례요한의 잡히심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가셔서 사신 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을 누가 하셨을까요? 

베드로전서 1:8~11절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구원의 은혜를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언한 것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방금까지 찾아본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하는 내용도 결국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기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놀랍고 두렵지 않습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연결되는 말씀을 보니 모든 말씀은 다 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다는 말씀을 베드로전서 1장과 연결하여 보니 앞에서 연결되는 베드로 전서 1:1~7절까지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도 함께 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본문만으로 한 시간 넘게 보아야 하지만 오늘 본문과 연결하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그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9~7절입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지난주에 본 성도가 받는 시험과 연결이 됩니다. 그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시험 받으심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받는 시험은 유혹이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이런 훈련은 잠깐 근심하게 되지만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연단들은 불로 연단하여 얻는 금보다 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연단들이 고난으로 다가올 때에 성도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여러 가지 고난을 받는 것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나라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썩어지고 더럽혀지고 쇠하는 것들을 빼내시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를 심어주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인용한 이사야 8:22~9:1절을 봅니다.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1)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여기서 언급된 이 지역들은 북 이스라엘 때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한 지역들입니다.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정복하고서는 이주정책을 써서 피를 섞어버렸습니다. 사마리아가 이러하였다면 이방인의 지역에 둘러싸인 갈릴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캄캄한 흑암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흑암의 땅에 빛이 비추일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본문이 인용된 최소한의 단락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8:16~22절입니다. “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나 남 유다가 멸망한 것이나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봉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봉해져 있는 상태에서 인간들은 종교적인 일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로 다는 것입니다. 산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아침빛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천지는 이 아침빛을 보지 못하는 것을 신천지의 교주를 만나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 교주를 만나야 바른 해석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의 샛별과 아침빛이라든가 하는 이런 표상들은 다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그리스도로 풀어내지 않으면 얼마든지 사사로운 욕심을 따라 특정 교단이나 교파나 교주를 위하여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적용하게 됩니다. 

이사야 시대나 지금이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밝히 보이지 않으면 캄캄한 어두움에 속하여 있습니다. 이렇게 어두움에 사로잡힌 지역을 대표적으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라고 합니다. 아예 갈릴리 지역을 이방인의 지역으로 말합니다. 이사야 시대에 이러하였기에 예수님 당시에는 더 하였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지역에 속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영광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캄캄한 흑암의 지역에서 일어납니다. 

이사야 9:1~7절입니다.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1)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그 방식은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전쟁이란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한 아기가 오셔서 전쟁을 하십니다. 그 아기로 오신 분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루어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잉태됨, 세례 받고 시험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다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을 예수님께서 지금 이루고 계시기에 17절에서 회개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천국이 우리에게도 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십자가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