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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3~17 의의 호심경(2) 2014. 4. 6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가 영적인 전투를 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도 의의 겉옷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허리띠에 대한 말씀과 의의 호심경에 대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의의 호심경에 대하여 지난주에 다 말씀드리지 못하여 오늘 다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이 제목으로 수십 번이 아니라 평생을 해도 부족한 내용입니다. 평생해도 부족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풍성한지도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시편 73편과 하박국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질문과 그 답변을 보면서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결론이 로마서 1:17절 말씀이며 이 말씀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로마서 1:17절을 다시 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로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의가 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이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인간에게 굴욕을 안겨준 것 같다’는 말을 지난주에 루터라는 책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굴욕을 안겨주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인간에게 굴욕적입니까?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유혹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의 능력은 제한적입니다. 이런 우리가 신이 되려면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을 믿는다고 하는 말 속에서는 나보다 능력이 많은 신에게 나의 정성과 나의 선행을 바쳐서 신을 기쁘게 함으로 그 신에게서 무언가 혜택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속성인데도 이것을 우리는 믿음이 좋다고 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것들을 신에게 바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신도 감동하여 그런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 준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일 뿐입니다.


포이에르 바흐라는 신학자는 ‘신은 인간의 투사(透寫,projection)’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제가 지금 예를 들은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프로젝트의 필름처럼 빛을 투사시켜서 화면에 비추어보면 인간들이 원하는 자아상이 비추어질 것입니다. 이런 것을 흔히 세상은 꿈이라고 하고 희망이라고 하고 비전이라고 합니다. 나의 마음의 소원들을 예상하여 계획한 것들을 저 미래에 투영시켜두고 그 꿈들을 이루어달라고 신에게 비는 행위들을 모아보면 결국 내가 능력이 많은 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학자들은 인간들의 종교적인 열심과 정성들은 결국 자기에게로 되먹임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지은 ‘도킨스’라는 사람은 기독교인들이 믿는 그런 성경의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두꺼운 책을 출판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과 부활과 그 영원한 세계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성경의 말씀을 믿는다면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죽음에 벌벌 떠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16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우리가 혈과 육에 속한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이 죽음은 단지 목숨 끊어지는 죽음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실패와 자존심상하는 것들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자존심상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들 가운데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혈과 육을 입으시고 죽음에까지 이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신다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즉 아브라함의 씨를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 믿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신 결과 그 의를 자기 백성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받은 복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자기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다윗도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은 자기의 행위가 아니기에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굴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굴욕을 당하기 싫어합니다. 믿음 자체가 굴욕적인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믿음을 자랑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말하면서 자기를 자랑할 것이 있다면 이 사람의 믿음이란 성령으로 주어진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로 나온 믿음입니다.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행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야 죄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합니다(요8:56). 다윗도 그리스도를 고백하였습니다(마22:45).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이 믿음으로 받은 복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로마서 4:1~8절입니다.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아브라함과 다윗이 받은 복이 일한 것이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입니다. 이 복이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로마서 4:21~25절입니다.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이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을 이방인도 포함이 됩니다. 이렇게 의롭다 함을 받는 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의 범죄를 해결하고 의롭다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웃음을 받는 일인지를 창세기 본문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7:15~19절입니다.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은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 웃음이란 어이없어서 비웃는 웃음입니다.


창세기 18:10~15절입니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웃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21:1~7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지난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자세하게 살펴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그 배경은 인간의 비웃음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이야기입니다.


시편 22:6~8절입니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로 시작하는 시편 22편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십자가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사람들은 꼭 이 반응을 보이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어 주겠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주제에 남을 구원한다니 말이 되느냐는 조롱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의 비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말씀대로 이루어져서 참된 웃음인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삭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자기 약속을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웃음이라는 이삭을 주었다는 것이 이삭의 이름에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듣는 이들도 함께 웃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듣는 믿는 것을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됩니다.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세상이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18~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의 도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들리게 됩니다.


이어지는 25~31절입니다.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자기 자랑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아무도 자기 자랑을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조롱하고 비웃고 침 뱉고 돌아선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오히려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용서와 사랑을 가지고 십자가로 찾아오셨습니다.


이어지는 30~31절입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났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용서입니다. 성도라면 이것 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은 어떤 사람인줄 알게 됩니까? 천한 것들이며 멸시받는 것들이며 없는 것들입니다. 참으로 굴욕적인 말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이 듣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영이 임하여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책망을 받기에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의로움임을 알고 믿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죄를 알지도 못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 아래 오셔서 죄가 되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의 피로 하나님의 의가 된 자들이 의의 호심경을 입은 자들입니다.


종종 말씀드린 내용입니다만 한문의 의(義)라는 글자는 나(我)위에 양(羊)이 올라가 있는 모양입니다. 나아(我)자는 손수(手)변에 창과(戈)자입니다. 노아라는 영화의 두발가인과 같이 창을 들고 사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이 덮여져야 합니다. 마치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에 죽음의 천사가 넘어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대적하는 의의 갑옷은 오직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의의 갑옷입니다. 이 갑옷을 입은 자들은 어떻게 영적인 전투를 하게 됩니까?


베드로후서 3:7~13절입니다.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사탄을 이 세상의 신이라고 합니다(고후4:4). 이 세상의 신은 눈에 보이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것들로 유혹을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요1서 2:16). 이런 것들을 위하여 시기하며 질투하는 것이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것들입니다(약3:15). 이런 사탄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의의 갑옷을 입은 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은 잠시 있다가 불에 살라질 것임을 알기에 온전한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