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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21~24 은혜에서 은혜로 2014. 5. 25


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2012년 3월 18일에 에베소서를 시작하여 오늘 마무리를 합니다. 만 2년을 넘게 에베소서를 보았습니다만 에베소서는 한통의 서신입니다. 소리 내어서 읽어도 15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만 2년을 넘게 보았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말하는 언어들이 얼마나 성경이 말씀하려고 하는 내용과 다른지 그 차이를 설명하다보니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이제는 대략 설명을 하였기에 오늘 전체를 한번 읽어가면서 전체를 살펴보는 것으로 에베소서 강론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말과 똑 같은 말이 성경에 있어도 그 뜻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복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복이란 에베소서에서 한번 나오는 단어입니다만 이 복이 무슨 복인지 이제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이라는 단어를 떠 올리면 당장 무엇을 복이라고 여깁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사람들이 말하는 복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을 교회 다니면서도 여전히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은 복이 아니라는 말씀을 성경으로 증거 하는데 한 시간으로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도의 복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1:3~14절입니다. “봉독” 사도 바울은 인사말을 한 후에 복에 대하여 말씀을 하려고 하니 찬양이 먼저 터져 나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영원한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에게 어떻게 이 놀라운 복이 주어졌는지 전하려고 하니 갑자기 찬송이 터져 나오면서 단숨에 3~14절까지 복에 대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이 복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말씀합니다. 이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것이기에 세상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추구하지도 않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에 아멘하며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만 아멘 할 수 있는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 근거하지 않음을 확실하게 전하는 내용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천지만물이 지어지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요즈음 진 에드워드의 책 몇 권을 보았습니다.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하며 창조와 동시에 종말의 완성을 말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시간을 멈추어 모든 심판거리들을 다 모아서 못 박아 버리는 표현 등은 창세전의 완성을, 인류의 타락 이전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들로서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전에 묵시와 역사를 설명하면서 ‘별에서 온 그대’ 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설명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시간을 멈추어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결과들을 만들어 놓고 시간이 흐르게 하니 시간이 멈추어진 것을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시간을 멈추고 이루어 놓은 그 일대로 진행이 됩니다. 이 주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인용을 했습니다만 진 에드워드의 ‘신의 열애’라는 책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분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병사는 목수의 손목에 못을 꽉 누르고는 망치를 든 손을 높이 들었다. 목수는 반대편의 손을 살짝 들었다. ‘시공간은 정지하라!’ 모든 천사의 불타는 영혼 가장 중심에, 믿기 어려운 무언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순간 머뭇거렸다. 목수가 명령했다. “이제, 모든 것을 십자가 위로 가져오너라!” “첫 사람 아담, 아담의 자손, 타락한 본성, 이방인과 유대인을 갈라놓은 벽, 모든 정사, 모든 권세 권력........ 그리고 주권. 모든 율법, 모든 계명, 모든 규례, 모든 성일, 그리고 모든 의식. 모든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암흑의 왕자와 어둠의 왕국이 그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아 그날, 십자가에 위에 매달린 이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단지 문학적 상상력만이 아니라 창세전 언약의 완성을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로 보여주는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아 버린다는 이 내용을 골로새서 2:12~17절까지만 봅니다.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방금 인용한 내용들은 골로새서의 이 말씀을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풀어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인사말을 하고 나서 본론을 시작하면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인데 그 택하심의 목적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가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2절에 보시면 이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점도 흠도 티고 없이 세우신 그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영광의 찬송이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하여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15~23절입니다. “봉독” 이 본문은 지난주에 기도의 내용으로 보았습니다. 이 기도는 바로 앞에 언급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아니면 이러한 복들과 은혜들을 결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1~10절입니다. “봉독” 은혜의 선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진노를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로 다 못 박으시고 자기 백성들에게는 긍휼과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사랑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로 된 것이기에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원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자기 행위에서 나온 것처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이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일만이 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2:11~22절입니다. “봉독”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평을 이루시고 동시에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원수 된 담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을 폐하신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새 사람을 지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시는데 이러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그리스도라는 터를 닦고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고 그 안에서 성도가 성령 안에서 성전이 되어갑니다. 이 처소가 완성이 되면 이 역사는 마감이 됩니다.


3:1~13절입니다. “봉독” ‘이러므로’ 바로 앞의 모든 말씀을 받고 있는 접속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새사람을 지어가는 일에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이 일을 위하여 자신이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꾼이 되기 전에는 이 복음을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놀라운 복음은 11절에서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다고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은 이런 것들이 막을 수 없고 오히려 너희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것이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3:14~20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의 두 번째 기도입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입니다. 그 기도의 결론은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의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면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면 이보다 더한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영광이 아니라 땅의 영광을 구하기에 이런 영광을 맛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는 능히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시고 이런 영광을 구하도록 조치하십니다.


4:1~16절입니다. “봉독”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은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그 하나 됨이란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합니다. 또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십니다. 이러한 은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십니다.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입니다. 그 머리를 통하여 도움을 받고 지체가 결합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 가십니다. 그러므로 나 개인 구원받았다는 구원파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을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내가 해체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구원입니다.


4:17~32절입니다. “봉독” 구원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날마다 벗고 날마다 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계속하여 일어나는 일입니다. 옛 사람을 벗는다는 말은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께서 이루어 가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이 명령들을 머리가 되신 주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32절을 보시면 우리가 어떤 용서를 받았는지를 정말로 안다면 형제에 대하여서도 용서가 됩니다.


5:1~21절입니다. 성도에게는 이전과 지금이 있습니다. 전에는 어둠이었습니다. 이제는 빛입니다. 빛은 어두음의 일을 책망합니다. 13절을 보시면 책망을 받는 것 마다 빛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으면 우리의 어두움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것이 빛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어두움이 스스로 빛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가면 죽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도 빛으로 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그 성령의 책망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더욱 빛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5:22~33절입니다. “봉독”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를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로 연결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하와를 만드신 그 하나님의 일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기 신부를 만들어 내시는 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아담의 희생으로 하와가 나오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신부된 교회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신부는 다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데 이것이 십자가로 언약을 완성하시고 그 성령을 보내심으로 하나 됨을 말씀하십니다.


6:1~9절입니다. “봉독”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만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말씀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종들과 상전을 통하여서도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진리를 설명하는 도구들입니다.


6:10~20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을 것과 항상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진리의 띠, 의의 호심경,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임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이란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이며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6:21~22절입니다. 바울사도가 3년이나 밤낮 눈물로 복음을 전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복음으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염려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정을 두기고를 통하여 알려주기 위하여 두기고를 보내면서 이 에베소서에 보내는 편지를 들고 간 사람입니다. 이 두기고는 사랑을 받는 형제이며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입니다. 골로새서도 이 두기고가 편지를 들고 갑니다. 로마에서 이곳 까지 와서 소식을 전하고 편지를 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바울의 사정을 알리고 에베소 교회의 성도를 위로하기 위하여 두기고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가 지금도 이렇게 남아서 우리에게도 증거 되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에게 있도록 축복을 합니다.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의 근원이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란 환경과 상관없이 주어집니다. 우리들은 늘 환경 탓을 합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자신의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이라는 환경, 아내라는 환경, 자녀와 부모라는 환경, 교회와 세상이라는 환경이 좋아지면 평안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사도는 감옥에 있으면서 오히려 밖의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24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지어다. 오늘 설교제목이 은혜에서 은혜로입니다. 에베소서 1:2절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처음 인사도 마지막 인사도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이런 은혜가 누구에게 있을 것이라고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조건이라면 단 한 사람도 은혜를 받을 자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24절입니다.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합니까? 나를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방편으로 예수를 믿어서 복도 받고 영생도 얻고 싶다면 이것도 저주 받을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함없이 영원토록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기를 저주선언 보다 뒤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되는 일이 은혜로 됩니다. 에베소서 전체를 살펴보면서 창세전과 영원전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은 변함없이 주님만 사랑하도록 주님께서 만들어 가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이 역사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붙들고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엡5:5). 결국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다 빼앗아 버리고 우리 주님만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만들어 내시는 일에 걸려든 자들이 창세전에 택한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죄가 어떠한지를 알게 되고 동시에 그 죄가 십자가로 용서 받음을 알기에 향유 옥함을 깨뜨린 여인처럼 세상 사람들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없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은혜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에게는 임하였고 임하고 있고 임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