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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4:10-17 두려운 언약 세움 2011. 7. 24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11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12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13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15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16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17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

 

깨어진 돌 판을 처음 것과 같이 만들라고 하신 것은 다시 언약을 세우신다는 말씀입니다. 언약이란 한 쪽이 파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파기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쪽에서 파기를 하여도 하나님 편에서 파기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유지가 됩니다. 수요일 저녁에 바울의 기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은 이미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지식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신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지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 결과물이 구약으로는 남은 자 이며 신약으로는 믿는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0-11절을 보시면 그 언약을 세우시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베풀겠다고 하십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시내산 까지 오면서 수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베풀겠다고 하시면서 네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 명령의 내용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쫓아내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두려운 일이며 이적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심기 위하여 가나안에 사는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신다고 하십니다. 쫓아내시는 정도가 아니라 진멸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진멸을 당하여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언약하셨습니다.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대로 지금 출애굽 하여 가나안으로 가야 합니다. 비록 언약의 돌 판을 받는 중에 언약을 배반함으로 언약의 돌 판이 깨어졌지만 다시 처음 것과 같이 만들라고 하셔서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이 그대로 성취가 되는데 그러면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왜 멸망을 당합니까? 그 이유는 죄악이 관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죄악이란 우상숭배와 음란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이러므로 이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죄악이 관영하지 않아서 심판을 받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죄악이 가득합니다. 그러면 무슨 자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도 죄인인 주제에 죄악이 가득하다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습니까?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진멸하라는 말씀보다는 그들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부수어버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만 신명기 7장 1-5절을 보시면 오늘 본문과 거의 비슷하게 말씀하시면서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과 언약을 맺으면 그 여인들이 너희의 자녀를 유혹하여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이가 윤리 도덕적인 수준에게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출애굽의 놀라운 기적과 광야를 거치는 기적과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그런 놀라운 이적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시는 일이 두려운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함부로 공격하면 공격하는 그들이 어떻게 멸망하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 경계가 무엇입니까? 언약 안과 언약 밖입니다. 언약 안이란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남는 자리가 언약 안입니다. 언약 밖이란 어린 양의 피 밖의 자리입니다. 단지 이 기준으로 진멸이나 아니냐의 갈림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두려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행위로 구원과 심판을 갈라놓는다면 사람들이 무언가 행할 일이라도 내어 놓을 수 있고 비록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면 정상참작이라도 하여 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을 세우시는 일은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수행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여호와의 언약 세우시는 일에 방해하거나 대들면 이방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진멸을 당합니다. 예를 들어 여리고 성 전투를 봅니다. 기생 라합이 민족을 배신하고 정탐꾼을 숨겨줍니다. 여리고 성의 군인이 라합에게 왔을 때에 정탐꾼이 나갔다고 거짓말 합니다. 이런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의 물건은 여호와께 바쳐진 것이기에 손대지 말라고 하였는데 아간이 손을 댐으로 그의 가족이 함께 돌로 침을 받습니다. 이런 것이 언약을 세우는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두려운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순종을 하였습니까? 예레미야 2:9-13절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싸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2:1-8절부터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청년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광야에서 함께 하신 것을 결혼으로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그 광야에서 여호와를 따라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이 열매를 삼키는 자는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닥치리라고 하신대로 이스라엘을 적들이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발락 왕이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여도 저주는커녕 축복이 쏟아집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놓았는데 그들이 한 일은 여호와를 멀리하고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맹세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에게 행하신 일에 무슨 불의함이 있었습니까? 결코 없었습니다. 인애와 사랑으로 대하셨는데도 이들이 행한 것은 우상을 따라 갔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배반하는 행위이며 약속의 땅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를 찾고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여호와를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이 반역을 하고 선지자들이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였고 무익한 우상을 따랐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도 이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과연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제사장과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과 선지자들이 여호와를 찾지도 알지도 아니하고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였다는 말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부르지만 그 내용이 바알이라는 말입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주는 신입니다. 그런 가나안의 신의 이름을 누가 부른다는 말입니까?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여야 할 지도자들이 바알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불러서 이 땅의 부와 권세를 탐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바알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알을 의지하는 이들을 심판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적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도 그들의 신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바꾸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의 백성은 여호와의 영광을 무익한 것 우상으로 바꾸어버렸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운 일이 일어나기에 하늘로 하여금 놀라고 두렵고 떨라고 합니다. 하늘도 두려워 떨 일이라고 합니다. 이런 심판을 받는 것은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웅덩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우상을 찾아간 행위가 이런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생명수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살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을 살리려고 하여도 우리의 목숨을 단 한 뼘의 길이도 더 연장하지 못합니다. 그러한데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절대 의존되어 있어야 생명을 얻는데 사람들은 이미 생명에서 끊어져 있기에 믿을 것은 자기의 행함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도 열심히 자기를 살려야 한다고 하고 교회에서도 열심히 자기를 살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확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1장을 더 보도록 합니다. 이 한 장의 내용이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과정과 언약 체결의 내용이 다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에 아멘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에 순종하면 복이 오지만 언약을 배반하면 저주가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셔서 간절히 경계하며 목소리를 순종하라고 하셨으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결국 언약의 규정대로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가 북은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은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서 그 포로 된 자들을 다시 돌이켜 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내십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자들이 어떤 모습인지 지난 주 새 신자 반에서 보았던 예레미야 31:8절을 봅니다.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자기 힘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자들이 남은 자가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예레미야 31장이 바로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언약은 두려운 언약입니다. 왜 두려운가 하면 오늘본문 14절에 질투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질투는 사랑하기에 나오는 감정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은 신부가 남편을 배신하여 바람을 피우는 행위가 됩니다. 남편은 목숨을 바쳐 아내를 사랑하는데 아내는 그 사랑이 싫다고 다른 남자를 따라가는 모습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좋다고 따라갑니다. 주변의 강대국이 좋다고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의 그늘에 피하려고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주변나라들까지 다 심판하셔서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시는데 그 방식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기록하십니다. 마음에 기록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자기 백성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됩니다. 이런 죄의 구체적인 모습은 자기주장입니다. 성경학교 때 초등학교 3학년이 ‘자기주장’이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에어컨을 틀었는데 남자아이들은 뛰어다녀서 덥다고 하고 여자 아이들은 춥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 학생이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 대하여 표현해보라고 하니 처음 온 학생인데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아서 아쉽고 마음이 아프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다 이루지 못하여 보이는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그 다 이루심이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다 이루심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히브리서 10:19-29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가 피 뿌림을 입으면 어떻게 됩니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합니다.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기에 이렇게 만들어내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도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의 은혜입니다.

 

26-29절을 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것이 언약 완성의 두려운 모습임을 생각하며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