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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4:18-26 빈손으로 2011. 7. 31

 

18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 그 절기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19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23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25 너는 내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제물을 아침까지 두지 말지며 26 네 토지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오늘 설교제목은 20절의 말씀을 따라 ‘빈손으로’라고 했습니다. 이 제목만 보면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말인지 빈손으로 오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어려서부터 어떤 설교를 들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올 때는 빈손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요예배도, 새벽기도회도, 구역모임도, 심방예배도 늘 헌금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말씀을 그렇게 적용해도 되느냐고 물어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셨는지 그 뜻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3:14-17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만 벌써 언약을 파기하였기에 언약을 새롭게 세우시면서 다시 말씀을 하십니다. 18-20절을 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과 연결이 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결정적인 날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안의 장자와 짐승의 초 태생 수컷이 다 살아남지만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아니한 집은 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 달을 아빕월이라고 합니다. 아빕월이란 유대인의 새로운 달력의 시작을 말합니다. 기존의 바벨론 달력이 아니라 새로운 달력을 만들게 하십니다. 출애굽기 12:2절입니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어린 양의 피로 새롭게 탄생된 민족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첫 해가 유월절이 됩니다. 유월절을 떠나면 존립이 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국가란 주권, 영토, 국민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아래 있어야 이스라엘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즉 무교절을 지킬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19-20절을 봅니다. 모든 첫 태생은 다 하나님의 것이며 처음 난 수컷의 짐승도 다 그러하다고 합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나귀의 목을 꺾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인다는 말입니다. 대속이 아니면 죽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도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하나님을 얼굴을 보지 말라고 합니다. 즉 대속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대속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1절을 봅니다. 유월절만 쉬는 절기가 아니라 모든 절기와 매 안식일도 쉬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노동력으로 살아간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노동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안식을 통하여 기억하게 하고 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농번기라고 하여도 안식일은 쉬라고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참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안식에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참된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자기 일을 열심히 잘한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22-24절입니다. 칠칠절과 초막절입니다. 칠칠절은 유월절부터 칠일을 일곱 번 계산하기에 칠칠절입니다. 이때는 보리추수를 하는 날이라서 맥추절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보리추수를 하는 것도 유월절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가을 추수를 거두어 들여서 창고에 보관한다고 해서 수장(收藏)절이라고 합니다. 이 수장절은 광야의 삶을 기억하도록 초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일 년에 큰 절기를 세 번이나 지켜야 하는데 멀리서 오면 몇 주일이 걸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이방나라들이 네 땅을 차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겠다고 하십니다.

 

25-26절입니다. 내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맏아들의 속죄나 처음 태어난 수컷의 희생 제사를 드릴 때에 누룩이 있는 떡을 함께 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누룩이란 부패를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다른 교훈을 누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희생의 피에 어떤 다른 것이 섞이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유월절 제물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게 합니다. 이 또한 부패하지 않게 하려는 조치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썩지 아니함을 보여줍니다.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삼지 말라는 것은 가나안의 주술적인 모습을 금하는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지소산의 처음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처음 것이 여호와의 것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처음의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빈손으로 오지 말고 처음 것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처럼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까? 맥추감사와 추수감사를 꼭 구약의 율법과 연결을 시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그런 절기를 지켜야 한다면 다른 절기도 다른 율법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왜 꼭 그런 절기들만 지키는 것이니까? 날과 달과 절기는 다 그림자입니다.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림자인데 지금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림자를 붙들면 실체요 머리가 되신 예수님을 놓치게 됩니다.

 

골로새서 2:16-19절입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은 교회라면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빈손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신 구약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처음 것의 희생물을 들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장자가 희생됨으로 나머지 동생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방식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을 대신하여 희생됨으로 장자의 몫을 차지합니다. 혈통적인 순서로 된 장자가 아니라 누가 희생하였는지를 통하여 장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맏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나머지의 거룩함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8:28-29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어떤 사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우리의 세상적인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을 말합니다. 맏아들의 희생을 자랑하기 위하여 다른 아들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빈손으로 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아들의 희생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16-18절입니다.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처음 곡식 가루가 거룩하다는 말은 처음 곡식의 희생으로 인하여 나머지가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다는 말씀은 유대인이 교만함으로 잘려나간 자리에 이방인이 접붙여졌습니다. 가지의 거룩이 아니라 뿌리로부터 진액을 빨아먹고 살기에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의 초 태생이나 곡식의 처음 것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짐을 통하여 나머지가 거룩함을 입는 방식이 바로 예수님께서 맏아들로서 희생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2:5-18절을 봅니다. “봉독” 시편 8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셔서 죽음을 맛보게 하신 것은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아직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한 것을 모든 사람이 보지 못하지만 성령이 임한 자는 그 발아래 지금 복종을 하면서 삽니다.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습니다. 이렇게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인데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기 위하여 구원의 창시자가 희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맏아들로 희생함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장자의 대속과 초 태생의 희생과 토지소산의 처음의 것을 들고 주께 나아온 것이 바로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신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빈손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빈손으로 가지 않으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자기의 희생과 자기의 공로를 주님 앞에 들고 나아가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처음 아들이든, 처음 익은 곡식이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신 그 뜻을 모르고 자신은 처음 것을 들고 왔다고 하는 것은 왜 처음 것을 가져오라고 하셨는지의 뜻을 모르고 문자대로 지켰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외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의 잃어버린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지를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리지 아니한 양 아흔 아홉 마리 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았다고 더 기뻐합니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이 부모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허랑방탕하게 창기와 다 말아먹었습니다. 거지가 되어서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자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으니 아들의 자격은 없고 그저 종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옵니다. 정말 빈손입니다. 그런데 아들도 맞아줍니다. 그런데 정작 큰 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왜 화가 났습니까? 자신은 빈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오늘도 여러 모양의 연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연보가 나의 노동력의 가치를 담아 왔습니까? 아들의 희생을 담아왔습니까? 아들의 희생을 담아오지 않았다면 억만금을 드렸다고 하여도 그것은 자기 의를 쌓은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입구에서 연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화를 넣는 자도 있었고 은화를 넣는 자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과부가 두 렙돈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은 이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빈손이 됩니다.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합니까? 맏아들의 희생으로 산다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은 물량적으로 수치를 성과를 가릅니다. 누가 더 많은 공헌을 하였는지를 봅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 가더라도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고 어려서부터 배워왔습니다. 친척집이든 친구의 집이든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제가 예를 들은 것 오늘 또 말씀드립니다. 초등학생 때 밀양에서 부산의 삼촌 집에 놀러오고 싶었습니다. 삼촌 두 분이 사시는데 같은 나이의 사촌이 둘이나 있었습니다. 폐를 끼친다고 가지 못하게 하는데도 떼를 쓰면 보내줍니다. 그때 빈손으로 가지 않고 미숫가루를 들고 갑니다. 요즈음이냐 건강식으로 수 십 가지의 곡식으로 만들지만 그 때는 순전히 보리쌀에 사카린을 넣어서 만들었습니다. 두 삼촌 집에 들고 갔는데 한 곳은 반갑게 받았고 한 곳은 삼촌의 장모님이 계셨는데 별 반갑지 않은 모습으로 한쪽으로 밀치며 보릿가루 타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40년 전의 일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들고 가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들고 오면 하나님께 흡족할 예물이 되겠습니까?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 아닙니다. 나의 맏아들도 아닙니다. 빈손 들고 주께와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