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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4:27-35 모세 얼굴의 광채 2011. 8. 7

 

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깨어진 언약의 돌 판을 다시 만들어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40일 주야를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였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손에 들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런데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40일을 완전금식을 하였는데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왜 얼굴에 광채가 납니까? 29절을 보시면 여호와와 말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0일을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와 말을 하였기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 자신은 얼굴에 광채가 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40일을 금식하면 죽습니다. 주변에서 40일을 금식하는 분들을 가끔씩 보지만 그들은 물은 마십니다. 금식 후에 모습은 힘이 없어서 부축을 받을 정도이고 금식 후에는 철저한 보호식을 하여 몸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물도 먹지 않고 40일을 금식하였는데 손에 두 돌 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얼굴에는 광채가 납니다. 이것은 여호와와 말씀을 나누었기에 때문이라고 합니다. 죽어야 마땅한데 죽지 않고 오히려 광채가 난다는 것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도 40일 금식 후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단의 유혹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이유입니다.

 

이것을 저는 은혜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본인은 다른 사람과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은혜를 입는 자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민수기 12:1-8절입니다. “봉독”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을 보고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향하여 불평을 나타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고 합니다. 자기들하고도 말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세 사람을 불러서 아론과 미리암을 책망하십니다. 모세는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합니다.

 

왜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습니까? 다른 선지자에게는 환상이나 꿈으로 알리시고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대면하여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진노하십니다. 아론과 미리암도 선지자이지만 모세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은 율법에서도 이방여인이 이스라엘에 편입됨을 보여주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알량한 민족적 자긍심으로 모세와 미리암이 모세를 힐난한 것은 마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과 어울린다고 힐난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민수기 12:3절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가장 오랫동안 대면하며 그의 형상을 본 모세가 온유하다고 합니다. 이 온유함은 모세의 훌륭한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여호와의 말씀을 친히 들은 자이기에 때문에 온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반역을 하면 모세는 늘 먼저 엎드렸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중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온유함이란 약함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을 알지도 못하였기에 그것을 과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부러라도 다른 사람들과 다른 표를 내고 싶습니다. 기도원에 갔다 왔으면 목소리라도 쉬어야 하고, 어느 집회를 갔다 왔다면 갔다 온 표를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은혜를 입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약한 자임을 압니다. 자신은 주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인줄 그 사람이 더 잘 압니다. 어떤 분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듣고 조금이라도 안다는 저역시 이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음을 보고, 아무 것도 아님을 날마다 느낍니다.” 그러므로 아주 조심스럽게 주변에 전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본인은 알지 못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사람들과 말할 때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35절을 보면 왜 가렸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기 때문에 가렸다고 합니다. 모세의 입으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보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려고 하였기에 가렸다고 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에 대한 관심보다도 외적인 기적과 표적들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일을 이루어내었는지 어떤 이적이 나타나는지에 더욱 관심을 가집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량적인 것을 결과물로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런 얼굴의 광채를 보지 못하도록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러나 수건으로 그 광채를 가린 것은 그런 뜻만이 아니라 장차 사라질 광채이기에 가렸다고 바울사도가 증거 합니다. 고린도후서 3:1-18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와서 복음을 훼방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부족하고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자들로 보입니다. 그래서 복음만이 영원한 영광이 됨을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의 말씀을 가지고 증거 합니다. 모세의 영광은 사라질 영광이지만 복음의 영광은 영원하다는 말씀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과 율법의 일꾼을 대비합니다. 율법의 조문은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율법의 조문이 죽이는 것입니까?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왜 인간이 저주를 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들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율법을 통하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죄하는 직분도 여호와의 말씀이기에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것입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이 영의 직분이란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말입니다. 새 언약이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옛 언약의 한계를 선지자들이 보고서 새 언약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들이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예언하였습니다. 그 언약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다 이루어내셨습니다. 그 다 이루심의 영광이 복음입니다. 이제 복음을 증거 됩니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크고 완전한 영광으로 인하여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12-18절을 봅니다. 모세는 사라질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으로 가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복음의 광체가 비취는데도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수건인데 아직 율법이라는 수건이 가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슨 영광을 보면서 살아갑니까?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런데 이 영광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8-9절입니다.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였습니까?

 

사람들은 다른 영광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심어놓은 헛된 영광을 추구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가려졌고 귀가 막아졌습니다. 그래서 참된 영광이신 분이 마구간에 오신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자라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더더구나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돌아가신 그 모습에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사랑하신 제자들조차 다들 배신하며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무도 십자가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이 완성되는 자리가 십자가인데 이 십자가의 영광을 세상을 결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물론 자기 백성들에게는 십자가 안에서 하늘의 영광을 조금씩 열어서 보여주십니다. 그 영광이란 우리가 달리 무엇을 보았다거나 들었다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 17:1-13절을 봅니다. “봉독” 베드르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는데 그 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형이 되셨습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본 영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별세를 의논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별세는 십자가입니다. 그 별세를 증거 하기 위하여 모세도 엘리야도 동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을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셔야 이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을 본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17-19절에서 더 확실한 예언이 바로 기록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에서 그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 까지 말씀에 주의하라고 합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오늘 이 시대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만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물론 그 영광이란 이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서만 보여줍니다. 고린도후서 4:3-7절을 봅니다. “봉독” 복음의 광채가 우리에게 비취는 것은 전하는 자가 받는 자의 능력이 아니라 창조의 능력으로 복음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셨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마태복음 17장에서 보았습니다. 그 영광을 자기 백성들에게도 주시는데 언제 그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3:40-43절입니다.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세상 끝에 나타납니다.

 

가라지는 풀무 불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세상의 사라질 영광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아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헛된 영광에서 자꾸만 탈락하게 하셔서 영원한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 안에서만 참된 영광, 영원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라질 영광이 아닌 영원한 영광의 주를 오늘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