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출애굽기 36:1-39:31 넉넉하여 남았더라!  2011. 8. 28

 

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4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5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6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7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지난주에 롯데 아파트 뒷길로 가다가 카페 이름이 ‘사바드’라는 곳을 보았습니다. 무슨 뜻인지 사람들이 잘 모르기에 괄호를 하여 [쉼]이라고 한 간판을 보았습니다. 사바드 또는 사바트라고 발음하는 히브리말은 안식을 말합니다. 언젠가 그 집에 가게 되면 그 집 주인에게 당신은 참된 쉼이 있느냐고 물어보려고 합니다. 쉼 또는 안식이라는 카페 만들어 놓고 장사 안 된다고 걱정하면 쉼의 집에서 쉼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안식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과연 마음 푹 놓고 쉬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인들 있습니까? 겨우 쉰다고 하여도 다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한 쉼만 있는 것이지 참으로 영혼의 쉼을 맛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교인들마저 참된 쉼이 없습니다. 적어도 교회로 모였다면 이곳에서나마 쉼을 맛보아야 하는데 교회라는 곳도 교회끼리 경쟁하고, 교회 안에서 경쟁하고, 교회 안에서 세상의 것으로 경쟁하는데 무엇으로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지난주 금요일 성경공부시간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등학생 두 명이 아파트에서 투신하였다고 합니다. 아파트 이름과 학교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한 명은 여학생이고 한 명은 남학생인데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에게 쪽지를 남겼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요? 치열한 경쟁에 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땅의 교육현실과 이 땅의 부모라는 우리 모두가 공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실의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시골이나 산골로 들어가서 느림의 삶을 사는 자들도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여도 참된 안식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된 쉼이 있습니까? 약 25년 전에 유대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책들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안식일-시간의 지성소’라는 책인데 최근에 새롭게 번역되어 ‘안식’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왜 이 책이 나왔는가 하면 이 시대가 무한경쟁의 시대에 참된 쉼이 없다고 보고 한국에서 최초로 출판하였다고 하는데 사실 1981년에 먼저 나왔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잠시 소개합니다. 안식과 거룩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가 시작 될 때, 단 하나의 거룩함, 곧 시간 속의 거룩함만이 존재하였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말씀하시면서 인간 속의 거룩함을 요구하셨다. “너희는 내게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공간속의 거룩함, 곧 성막을 짓도록 명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물 숭배, 금송아지 숭배의 유혹에 굴복하고 난 뒤에 일어난 일이다. 시간의 성스러움이 가장 먼저 왔고, 그 다음으로 인간의 성스러움이 왔으며, 공간의 성스러움은 가장 나중에 왔다. 시간을 성화하신 분은 하나님이었고, 공간 곧 성막을 성별한 이는 모세였다.]

 

우리가 지금 보는 말씀이 공간의 거룩함을 말하는 성막입니다. 이 성막은 세 가지 거룩함 중에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러면 제일 처음이요 가장 중요한 거룩함이란 시간의 거룩함이라고 합니다. 천지창조를 하시고 인간의 범죄 이전에 시간의 거룩함이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범죄 한 인간을 거룩하라고 하시면서 인간이 스스로 거룩할 수 없기에 특정한 거룩한 공간을 만들게 하시고 그 거룩한 공간인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를 통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하시는데 이것이 성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룩함을 얻는다는 것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 랍비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간이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안식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떠났기에 스스로의 안식을 찾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는 결과가 무한 경쟁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안식을 스스로 마련하려고 하니 도저히 쉴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쉼 없이 일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돈이 있으면 이제 좀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그 액수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평생을 죽도록 일하여 달성하는 순간에 안식이 옵니까? 더 큰 욕망이 또 나오기에 쉼이 없을 뿐 아니라 그동안 쉬지 않고 몸을 혹사하여 병이 들고 또 그 틈에 가정은 깨어지고 자녀들은 탈선하고 경쟁에 이기지 못한 아이들이 목숨을 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에 쉼과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생길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봅니다. 출애굽기 36:1-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고 명령하시면서 그 명령에 자원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런 자원하는 마음이 어떻게 부어집니까?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심으로 됩니다. 성막을 만드는 일에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이런 지혜와 총명을 받아서 책임자가 되고 이들이 또 다시 사람을 부르는데 이들 역시 여호와께 지혜를 얻고서 성막을 만들기 위하여 나온 자들입니다.

 

3-7절을 봅니다. 성막을 만들기 위하여 자원하는 자들에게서 물품을 받는데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던 일을 중지하고 와서는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고 남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진중에 공포하여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그제야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무슨 경쟁이 있습니까? 복 받으려고 합니까? 의무감에 합니까? 전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시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길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여 금과 은과 여러 가지 패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생활필수품들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품들이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더 소중할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자기들의 귀한 물건을 우선 챙기고 꼭꼭 감추어둡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 할 때에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금이나 귀금속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하나씩 주고 살아남은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광야에서 성막을 만드는 일에 넘치도록 드려서 넉넉하여 남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런 말씀을 가지고 예배당 건물을 지으면서 성전을 짓는다고 하면서 헌금을 강요합니다. 특별 부흥회를 하면서 온갖 간증들을 모아서 헌금 안하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과도하게 작정을 하게 해서 건물을 짓고서는 부도가 나서 다른 곳에 넘어가는 곳이 창원에만도 한 두 곳이 아닙니다. 목사들이 이런 말씀을 보면서 왜 우리는 넉넉하지 못한가를 생각하면서 주여 성령의 감동을 달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과연 그런 기도와 목표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최근에 오신 여러분들이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늘푸른교회는 그런 부담이 없겠다고 오셨는데 역시 이곳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참된 안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넉넉하여 지겠습니까? 이런 마음은 이미 자기를 중심으로 한 안식을 꿈꾸고 있기에 참된 쉼과 넉넉함을 맛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는지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인지 보고서 하나님의 일을 믿는 것이 우리의 안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한 안식의 결과로 우리의 마음에 쉼이 있고 그 쉼과 여유로 인하여 넉넉함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평생에 자기만을 위하여 살기에 남을 위하여 손이 펴지지 않고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성막을 만들게 하시는 것이 나중에 건물로 된 성전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되지만 그러나 곧 성전에 우상이 가득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거하실 수가 없어서 떠나 버립니다. 그래서 성전이 파괴되고 다시 재건이 되었지만 그 성전마저도 예수님께서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고 하시면서 헐어버리고 자신의 몸이 성전 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할 처소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안식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시면서 이 관계 속에 들어와야 우리도 참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자원하여 드려진 예물로 성막이 만들어지는 것은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자원하여 자신을 온전히 드리심으로 완전한 성전이 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부르시는 자들에게 넉넉함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들만 해도 5천명이나 되는 무리가 넉넉하게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경제가 넉넉하여 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떡을 먹고 배불러서 따라 다닌 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다시는 따라 다니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6:26-59절입니다. “봉독” 만나를 먹은 자들이 죽었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누구만 알아듣고 믿게 됩니까?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 주시는 자들만이 알아듣고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떡으로 얼마나 넉넉하신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예수님의 생명의 떡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넉넉한 생명의 떡을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이미 생명에서 끊어져 있기에 생존을 위한 떡, 아무리 먹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썩는 양식에만 마음이 빼앗겨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공급받으며 살아갑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자신의 자신됨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는 두 자매의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삽니다.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면서 자기들끼리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 거야! 전혀 잘 사는 것이 아닌데 그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기며 살기에 만족하고 사는 것입니다. 소망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기에 넉넉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3절입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또는 믿고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거처를 예비하기 위하여 먼저 가셨습니다. 이 거처란 십자가로 완성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거할 수 있는 것이 거처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합니다. 이 거처에 들어가는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만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는 넉넉합니다. 2천 년 전부터 주어지고 있지만 다 함이 없습니다.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넉넉하게 얻게 됩니다.

 

사도행전 2:36-42절입니다. “봉독”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선포에 찔림을 받은 자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데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 모든 먼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멀리 있는 우리까지도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니 예수님의 살과 피를 넉넉하게 먹고 마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 때문에 참된 쉼과 넉넉함을 더욱 많이 맛보아 가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짐만 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짐도 함께 지고 가는 넉넉함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