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출애굽기 40:34-38 구름기둥 불기둥 2011. 9. 1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여호와의 명령대로 성막의 역사(役事)를 마치니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임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한 것이 구약시대에는 가시적으로 구름이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구름이란 우리가 요즈음도 볼 수 있는 그런 구름과는 다른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름이 낮에는 시원한 구름기둥인데 밤에는 불기둥이 됩니다. 그러면 새벽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과 구름이 함께 섞인 기둥이 됩니다. 출애굽기 14:24절입니다.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구름기둥 불기둥은 홍해를 건너기도 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 뒤에는 애굽의 특별 병거 부대의 추격이 있습니다. 진퇴양난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곳으로 인도하여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우리를 애굽에서 모세 당신에게 한 말이 우리를 애굽에서 가만히 두어라 애굽의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괜히 출애굽시켜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원망합니다. 이 출애굽이 구원의 모형인데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끄집어내시는 방식이 이런 방식인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원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원망의 결국이 예수님을 죽인 죄로 드러날 때에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하게 됩니다.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모세는 오늘날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는 원망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고 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역할을 봅니다. 출애굽기 14:19-20절입니다. “19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구름기둥 불기둥이 둘 사이를 가로막아서 구원하여 냅니다.

 

그러면 왜 구원하여 냅니까? 출애굽기 29:45-46절입니다.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거하시려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위하여 구름기둥 불기둥이 어디로 인도하여 가시는 것입니까?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합니다. 그 말씀에 의하여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성막이 완성되자 성막위에 구름기둥 불기둥이 머물기도 하고 떠오르기도 하면서 이스라엘의 진행을 알려 줍니다.

 

오늘 본문 36-37절을 봅니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면 행진을 하고 머물러 있으면 언제든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행과 주거이전의 자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성막의 구름만 보고 있다가 떠오르면 가야하고 머무르면 멈추어야 합니다. 내가 머무르고 싶지 않는 곳인데도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머무르고 싶어도 구름이 떠오르면 가야합니다. 오늘 우리의 걸음도 우리가 걷는 것 같지만 우리의 걸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10:23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우리의 걸음이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걸음을 지도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들을 우리가 의도하여 온 걸음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 누가 장담할 수가 있습니까? 제가 아는 어느 목사가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함께 죽을 수 있다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나왔습니다. 이 목사가 큰 교회 목사에게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지요! 내가 비록 교인은 작지만 큰 교회 당신 부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죽겠다던 그들이 문제 일으키고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시지 않으면 누구든지 다른 길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아 가며 그것을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이들이 행한 일은 늘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원하는 길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머무르고 떠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데 가는 길조차 양식이 없고 물이 없는 곳으로만 인도합니다. 왜 그렇게 주리게 하시고 낮추게 하시는 것입니까? 신명기 8:3절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배성들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여 주시는 것이 참된 생명인데도 이들은 거절하였습니다. 거절한 자들이 광야에 쓰러지게 하시면서 결국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구름기둥 불기둥은 사라집니다. 이제는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가야합니다. 나중에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에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가시적으로 임재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전에 우상이 가득하게 되자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게 되고 언약의 저주대로 북은 앗수르에 남은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회개하는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하여 우상숭배만 한 것을 고백합니다. 이 본문 전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언약을 갱신하는 장면입니다.

 

느헤미야 9:1-38절입니다. “봉독” 이 회개의 내용 중에 구름기둥 불기둥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성막을 중심으로 있었다는 것은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성막이 건물 성전으로, 건물 성전이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되는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성전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이 성전입니다. 이런 성전이 된 성도는 성령께서 외부에서 함께 하시던 구약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와 달리 보이지는 않지만 성도 안에 임하심으로 성전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봉독” 이미 구약에서 예언한 내용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내십니다. 그 다 이루심을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이 임한 자가 성도가 됩니다. 이런 성도의 마음에 성령이 임한 것이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구약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옛 언약에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남편이 아내의 손목을 잡고 가는 식으로 데려가도 마음이 애굽으로 향하였습니다. 이제는 아예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옛 자아는 계속하여 도망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에 임하셨기에 어디에 간들 그 곳이 주님 안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시편 139편 7-12절에서 봅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인용한 앞부분도 주님께서 전후로 나를 안수하시니 우리의 행위와 생각까지 다 밝히 아시는 분으로 말씀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이 이제 성령이 임한 자에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동행이 우리의 본성을 얼마나 거스르는 일인지 이미 구약 전체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암소처럼 한 번도 멍에를 매어보지 못한 암소가 그것도 젖 먹는 새끼를 뒤에 두고 울면서 올라가야 하는 것은 그 소의 수레에 언약궤가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들이닥친 인생은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길로 인도를 받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구약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경우를 통하여 봅니다.

 

창세기 5:21-24절입니다.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부터 하나님과 삼백 년을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기도원에 가서 수도하면서 동행한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삼백년을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니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당시에 약 천년을 가까이 살았는데 삼분의 일만 살고 하나님이 데려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이렇게 동행하였을까요? 므두셀라를 낳을 때에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에 대하여 유다서 14-15절을 봅니다.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늘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시니 세상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을 보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말하였을까요? 인생 절반도 살지 못하고 요절하였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죽지 않고 데려갔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 자들은 행방불명되어서 객사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히브리서 11:5절입니다.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미가선지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동행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에녹만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과 동행한 자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이란 히브리서 11:6절에서 나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데 그 믿음이란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동행하는 자들이 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상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처소 삼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하나님의 자기 처소 삼으시는 것임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출 세상 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처소 삼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이 피조물의 원래 자리이며 그것이 또한 영광의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고집하며 삽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고집이 강하고 세어도 주님의 열심과 고집은 영원하시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이 빈틈없이 세워지게 됩니다.

 

10년 전에 출애굽기를 시작하여 중간에 한번 쉬었다가 이제야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출애굽은 날마다 일어납니다.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인도하여 내셔서 주의 처소를 삼으시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이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일에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듯이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시고 그 다 이루심의 결과로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이 일에 끌려가는 자가 출애굽이기에 날마다 별세가 일어납니다.